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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미발굴독립유공자 정용선선생에 대한 사연입니다.
글쓴이 정병기
날 짜
10-02-07 09:47
조회(5417)
미발굴독립유공자 정용선선생에 대한 사연입니다.

 

저의 애절하고 절박한 사연에 대하여 알려드리오니 한번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하여 항일독립운동으로 군자금 및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체포되어 경성형무소에서 41세(1928년5월20일 오후3시15분/제정호적에 일제가 기록하였습니다.)에 젊은 나이에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보시지 못하고 옥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한체 잊혀진 명예가 되어버렸답니다.
 
저는 증손자로서 지난 30년 세월을 증조부 독립운동 관련 자료발굴에 나섰지만 많은 자료가 소실되거나 정부의 관리부실 그리고 관보를 지시하여 소각되었답니다. 이런 사연에 대하여 이번에 국무총리실 행정심판위원회에 400여장의 증거자료와 소장을 내어 억울한 일을 해결하여 달라고 행정심판을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제기했답니다. 한번 꼭 관심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행정심판 접수일/2009.8.28. 접수번호 행심-2940
소장 포함 400페이지 분량/동영상자료(kbs1 tv 시청자칼럼)포함


 
존경하는 김 양 국가보훈처장님께

국가보훈처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젊음을 받치며 투쟁하시다 체포되어 1928년5월20일 오후3시15분 경성형무소에서 병사하신 정용선 선생인 증조부님에 대한 자료발굴 노력을 해왔으며 독립유공자 신청을 해 보았지만 거증자료 미비로 미루어온지 벌써 20여년이 다가오고 있어 안타깝게 생각하며 안타까운 사연들이 연합뉴스, 매일경제신문, 서울신문, 브레이크뉴스 등에 보도되고 심지어는 kbs1 시청자칼럼에 출연하여 호소하여 보았지만 아직도 잊혀진 명예를 찾기가 너무나 어려워 눈물로 세우러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악명높던 경성형무소에 관련한 자료가 매우 부족하고 그에 대한 연구도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 관련자료 찾기는 너무나 어려운 현실입니다. 저는 이번에 국무총리실 행정심판위원회에 이 억울한 사연을 알려 행정처분을 받아 보기로 결심하고 모든 자료를 정리하여 제출 접수하였답니다.

[kbs1 tv 시청자칼럼 출연] 독립운동가 기록찾기 30년./억울한 사연 행정심판청구
작성일: 2009/08/29 AM 04:06
작성자: 정병기(jbg1219)

[kbs1 tv] 독립운동가 기록찾기 30년의 노력 /출연 정병기
방송일: 20080814 /동영상/억울한 사연 국가보훈처 상대 행정심판 청구

우리들세상/시청자칼럼/다시보기 가능합니다.(출연자/정병기) highSpeedVod(1539806);
시청자칼럼.우리사는세상에서 그 결과를 지켜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억울한 세상이 없는 살기좋은 대한민국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모든 거슬 버리고 조국에 받치신 애국선열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을 가져야 하며, 또 그들의 후손드리 잊혀진 선조의 명예를 찾을수 있게 협조하고 그렇게 돼야합니다.

서울에 사는 정병기씨는 정씨의 증조부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시다 옥사하셨지만 근거자료가 부족해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씨는 근거를 찾기 위해 30년째 노력을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정씨는 증조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왔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증빙자료 발굴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호소한다.

시청자칼럼에 출연했으나 아직까지 인정하지 않아 결과를 얻지 못한 억울한 사연을 국무총리실 산하 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청구했습니다.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며 답답하답니다. 다시는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문서가 없어지고 소각된 사유는 정부의 귀책사유인데도 인정하지 않고 변하지 않은 국가보훈처의 잘못된 관행과 고정관념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지난 30년 세월을 증조부 독립운동 자료 발굴을 위해 노력했지만 국가보훈처가 인정하지않아 억울한 사연을 행정심판청구를 통하여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국무총리실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제기했습니다. 소장을 포함한 서류 400여장 분량에 관련 동영상 자료(2008.8.14. kbs1 시청자칼럼) 소장에서 항일운동으로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던 중 병사로 독립유공자를 인정하여 잊혀진 명예를 회복시켜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습니다.

이제 국가보훈처인 피청구인과 청구인간에 열띤 공방이 전개 될 것입니다. 아마도 정부의 독립운동 관련 서류가 영구보존문서임에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귀책사유가 도마위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방송관계자분 그리고 시청자 여러분의 많은 협조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선조의 훌륭한 "독립운동 자료 찾기가 독립운동하기 보다 어려워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애국선열과 호국영령 그리고 그 후손들이 대우받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며, 지난 30년이상을 증조부의 잊혀진 명예를 바로 세우고자 한 노력이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존경하는 국가보훈처장님

후손들이 선조의 훌륭한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찾기가 독립운동 하기 보다 어려운 현실이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선조의 잊혀진 명예를 찾을수 있게 한번 더 검토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경성형무소에서 사만하셨어도 시신도 인도받지 못한 채 증조할머니 묘소에 비석만 세워놓아 하루속히 잊혀진 명예를 찾아 국립묘지에 가묘라도 모셔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이 마땅히 후손이 해야 할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지난 30년세월이 증조부님의 명에를 찾는데 기여하게 된다면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 집안은 증조모님 독립운동으로 풍비박산이 되고 일제의 혹독한 감시와 박해로 집안이 흩어지고 머슴살이 전전하거나 처거살이로 살아와쑈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부친도 배움이 없는 (문맹인)무학이시고 저역시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이며 부친도 이번에 50년만에 국가유공자 신체검사를 받고 잇으며 저의 아들도 의경으로 입대하여 평택집회현장에서 진압근무 중 다쳐 제대를 하였답니다. 저말 위로 보나 아래로 보나 국가에 충성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는 평범한 국민이랍니다.

다시한번 정용선 선생에 대하여 철저한 조사와 검토가 이루어져 잊혀진 명에가 반드시 찾아질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미발굴독립유공자 정용선의 증손자 정병기<국가유공자>
행정심판 접수일/2009.8.28. 접수번호 행심-2940
소장 포함 400페이지 분량/동영상자료(kbs1 tv 시청자칼럼)포함




항일독립운동 중 체포 1928년5월20일 오후3시15분 병사  /선조 독립운동 자료 찾기가 독립운동하기보다 어려운 현실!!
 
< 증조부 독립운동 밝히려 30년 `고군분투' > 정병기/011-310-2953

 

증손자의 도리는 돈버는 일보다도, 조상님의 업적과 공훈 찾아 자손된 도리가 더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지난 30년간 외길 인생 걸어, 이제는 마무리 지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 서슬퍼런 일제에 독립위한 투철한 항일정신 자세를 본 받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군자금 모금하다 경성형무소에서 옥사"

보훈처 "객관적 증명자료 없어 서훈 불가"


(서울=연합뉴스) 조성미 기자 = "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합니다"

정병기(49)씨는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무형무소)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30년 가까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일가친척과 이웃의 증언을 토대로 "증조부 정용선(1883년생) 선생이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께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정씨에 따르면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이 날아왔다.

정씨는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수형 사실뿐 아니라 다른 정황도 증조부의 항일 행적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파내버린' 사실과 그가 실종된 이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킨 사연 등에 비춰 증조부가 독립운동을 한 게 틀림없다는 것.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하고 개가했다는 게 정씨의 전언이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된 것을 제외하면 그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정씨는 고향 마을을 뒤져 증조부가 생존했을 당시 소년이었다는 90대 노인의 증언을 녹취하는 등 증조부의 항일 흔적을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판결문 등 구체적 증빙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 서훈을 끝내 받지 못했다.

그는 "정부가 요구하는 서류를 찾아 고향인 봉화군에 증조부의 수형기록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기록을 소각했다'는 어이없는 답변이었다"며 "서류를 태운 정부가 서류를 요구하는 꼴이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내에서 안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지불하고 사오기도 하고 일본 외무성에도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정병기씨는 "독립운동가의 자료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것은 정부의 귀책 사유인데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집안이 가난해 문맹으로 살아야했던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대부분의 독립투사 후손이 무지하다는 것을 정부가 악용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1980년 강력범을 검거하다 국가유공자인 상이군경회원이 됐다는 정씨는 "서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을 멈출 수가 없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니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낼 것을 검토 중이다"고 밝혔다.

정씨 주장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객관적인 자료가 검증이 돼야 서훈을 추서할 수 있다. 정부에서도 정씨 증조부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으나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helloplum@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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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 수형자료 없다고 독립유공자 외면"
 
[밀착취재] 미발굴 독립유공자들의 잊혀진 명예
 
임민희 기자 
 
 
 
 
 
 
 
 
 
▲지난 30년간 증조부의 항일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정병기씨    &copy; 임민희 기자 

올해로 광복 63주년을 맞았지만 과거사 정리 작업은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독립적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광복 후 권위주의 통치시까지 항일독립운동과 해외동포사, 민간인 집단 희생 등의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을 진행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역대정권마다 과거사 문제는 가장 껄끄러운 문제로 치부되거나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현 정권에서도 친일인명명단 공개와 관련해 “친일문제는 공과를 균형있게 봐야한다”한다거나 대일관계에서도 실리외교를 표방하며 “일본에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발언하는 등 과거사 정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이처럼 과거사 정리 작업이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친일파들은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반면 일제강점기 시대에 항일운동을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한 채 과거 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이들을 외면하는 동안에도 미발굴 독립유공자들의 행적을 찾기 위해 지난 30년을 추적해온 이가 있다.
정병기(51)씨는 증조부인 정용선 선생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이 잡듯 뒤져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에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찾아냈고 주변인들의 증언을 확보했다. <사건의내막>은 정병기씨를 만나 정용선 선생의 독립운동 발자취와 지난 30년간 동안 고군분투했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씨 “증조부는 일제시대 군자금 모금 벌이다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숨졌다. 제정호적과 주변인들 증언 등 항일운동 행적 드러났음에도 보훈당국은 외면…수형인 명부 정부에 의해 소각돼” 분개
“증조부는 일제시대에 군자금 모금 운동을 한 혐의로 악명 높은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숨을 거뒀다. 이는 일본형무소장인 제정호적에 기록돼 있다. 증조부로 인해 우리 집안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일가족들이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파냈고, 증조모를 개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곧 발각돼 증조모는 굶어 죽었고, 조부는 탄광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전전하다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등 기구한 인생을 사셨다. 제정호적과 주변인들의 증언 등 증조부의 항일운동 사실이 명명백백한데도 보훈당국은 구체적인 죄목이 적힌 수형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 30년을 하루 같이 증조부의 항일행적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온 정병기씨는 “광복 63주년이 무색할 만큼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발굴작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독립운동가들의 자료를 보존하고 발굴하는 것은 국가의 몫인데 그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직접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성토했다.
정씨가 증조부의 명예회복에 이처럼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다분히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는 경찰관으로 복무하던 중 1980년 강도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칼에 찔려 국가유공자인 상이군경회원으로 연금을 받고 있다. 더욱이 증조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증손자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
정씨는 “증조부님의 행적을 찾아다니면서 보상금 때문이라는 둥, 미쳤다는 둥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그간 마음고생을 털어놨다. 그는 “솔직히 경제적으로 힘들게 사신 아버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증조부의 명예회복”이라며 “한국의 진정한 독립은 이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발굴이 이뤄질 때 참의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신념을 피력했다.
 
 
▲정씨의 민원제기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답변    &copy; 브레이크뉴스 

 
 
▲봉화군은 증조부의 수형인 명부가 형의실효등에관한법률에 의해 폐기됐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copy; 브레이크뉴스 

그가 증조부인 정용선 선생의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선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조상들의 성묘조차 갈 여건이 안됐지만 정씨의 아버지는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를 데리고 경북 봉화군에 있는 묻혀있는 증조모에게 성묘를 갔다.  그러나 증조부의 산소가 없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고 아버지로부터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 투옥된 후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어린 나이였지만 막연하게나마 증조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증조부를 찾기 위해 친인척들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 상황을 물었고 기구했던 가족사를 알게 됐다. 친인척들 및 주변인들의 증언과 30년간 증조부의 발자취를 찾아다닌 끝에 그가 밝혀낸 정용선 선생(1883년~1928년)의 행적은 이렇다.
정용선 선생은 1983년 12월17일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의성, 풍기, 울진, 영덕, 영주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만주에 있는 독립군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돈은 척곡교회(1909년 설립, 2006년 6월19일 등록문화재 제257호로 지정) 창립자 김종숙 목사와 논의해 독립군에게 보냈다.
그러던 중 당시 거부들이 모여 살았던 충북 청주군(현 청원군) 양석면 도원리에서 만석군의 집을 털다 발각돼 1년 만에 다시 경북으로 도망을 나왔다. 그러다 1916년 갑자기 종적을 감췄고 10여년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이 날아왔다.
정씨는 “친인척분들이나 주변인들 모두 증조부님이 군자군 모금 운동을 했다고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며 “당시 경성형무소는 항일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이 투옥된 던 곳으로서 고향이 경북인 증조부가 경성으로 압송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항일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군자금 모금 운동의 근거지였던 척곡교회의 김종숙 목사의 손자 김명성(83)씨도 “조부로부터 정용선 선생과 함께 군자금 모금활동을 한 바 있다고 들었다”고 인우사실 증명서를 써줬다고 주장했다.
김명성씨는 인우사실 증명서를 통해 “척곡교회는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의 비밀 결사 장소로 활용되었다. 군 자금 모금은 관내 친일파나 지역거부들의 집이 대상이었는데 야간에 침입해 금품을 강탈, 폭력을 행사하여 수탈하였고 소나 가축 등 금품환전이 가능한 모든 것들이 대상이었다고 조부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말했다. 또한 김씨는 정용선 선생이 군자금 모금 운동은 물론 일본군과의 항일 전투에 참가해 싸우던 중 체포됐다고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정용선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군 자금 모금 과정에서 일제 헌병과 경찰과 수차 격돌한 바 있고 관공서 습격과 방화 등을 수시로 시도했다고 한다.
또한 의병대장 석태산과 함께 재산전투에 참가해 동지들과 전투를 직접하며 항전했다는 것. 그러나 물자부족과 병력의 열세로 패해 후퇴, 석태산 의병장 가족은 강원도 평창 사거전 교회로 피신시키고 석태산, 정용선, 김명림 등 잔여병력은 소백산으로 이동 침입하여 병력을 재정비했다고 한다. 이후 군자금 모금 운동을 계속하던 중 일본군의 간교(만나 협상 요청)에 의해 협상장에서 체포되어 석태산 의병장은 현장에서 처형당하고 정용선은 소백산에서 체포돼 경성으로 압송된 후로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김명림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0년을 복역하고 만기 출소 후 독립운동본거지인 척곡교회로 돌아와 조부와 함께 거주한 사실이 있다고 전했다.
 김씨는 정용선 선생의 가족 상황에 대해서도 소상히 증언했다. 그는 “정용선의 가족들은 일제의 모진 박해와 고문으로 어려움을 겪은 바 있고 정용선의 처에 대해 집안 일가친척의 주선으로 개가하였다는 사실을 인근 주민으로부터 듣고 확인했다”고 말했다. 정용선 선생과 달리 김명림씨는 수형인 명부에 기록이 남아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정부가 독립유공자 발굴해야”
 
 
▲척곡교회 창립자 김종숙 목사의 손자 김명성씨가 써준 인우사실 증명서(왼쪽) .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일제시대 제정호적(오른쪽)    &copy; 브레이크뉴스 

정씨는 김명성씨의 증언처럼 증조부의 항일운동 여파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일제는 수시로 찾아와 감시와 고문 등의 탄압을 일삼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집안어른들이 증조부를 족보에서 파내고 증조모의 이름을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고친 후 야밤에 40리 떨어진 인동장씨 집안으로 개가시켰다는 것. 그는 그 근거로 인동장씨의 호적에 기록된 증조모의 이름 ‘정열이’를 제시했다.
정씨는 기구했던 가족사를 설명해 나갔다. 증조부는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으나 딸은 병으로 죽고 아들(조부 정덕수)은 증조모를 따라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인동장씨 집안은 모진 박해를 받았고 증조모는 초가집에 감금되어 굶어죽었다. 조부는 집을 나와 큰아버지집 근처의 광산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에서도 여전히 일본군의 엄한 감시를 받았다. 조부는 결국 광산에서 일을 하다 폐병으로 사망했고 당시 7살이었던 아버지(정건순)는 5살인 남동생을 데리고 남의 집 머슴살이와 공사판을 전전하다 어머니를 만나 데릴사위로 들어가 살게 됐다는 것이다.
정씨는 “아버지는 배움이 없어 글을 모르신다. 증조부를 시작으로 계속된 일제의 탄압은 해방된 오늘날까지도 깊은 생체기가 되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며 “이는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친일파 후손은 부와 권력을 누리고 독립유공자 후손은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는 부조리한 현실 때문”이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이러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자 오랜 세월동안 물불을 가리지 않고 증조부의 행적을 추적해갔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정씨는 지난 30년간 증조부의 활동근거지로 알려진 경북 봉화군 일대의 모든 면사무소를 비롯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경찰관으로 복무하는 도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수 십리를 오가며 기록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결과 10년이 흐른 후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과 당시 봉화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인 독립군 명단을 입수했다. 또한 증조부 생존 당시 소년이었던 90대 노인의 증언도 확보했다.
보훈처 “독립운동 사실 검증돼야 서훈 추서”
그러나 보훈당국은 “구체적인 죄목이 담긴 수형 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정씨는 포기하지 않고 1989년부터 수형기록을 찾기 위해 법무부와 경찰청,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관련자료가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이에 봉화군에 증조부의 수형기록을 요청했고 “수형인 명부는 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폐기됐다”는 답신을 받았다. 정씨는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담긴 중요한 자료를 어떻게 국가에서 소각할 수 있느냐”며 “정부가 자료를 없애놓고 그 후손보고 그것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법무성과 미국 국무부 문서보존소에 도움을 요청,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보내 수형인 명부가 들어있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지불하고 구입했다. 그러나 증조부의 항일행적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2005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증조부의 독립활동을 인정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으나 이 역시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답변만 할 뿐이었다.
정씨는 “정부는 미발굴 독립유공자에 대해 관심이 없지만 이분들의 땀과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며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개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다. 국가가 계속 외면한다면 향후 행정소송 등 법정싸움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정씨의 ‘정용선 선생 독립운동 관련 자료발굴과 재신 요청에 대해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관계자는 지난 7월28일 공문을 보내 “정용선 선생에 대해 자체적으로 현지조사를 시행하고 자료를 수집해 2009년 3?1절 계기심사에 부의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결과는 내년 2월말 경 통보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30년간 “객관적인 자료가 검증돼야 서훈을 추서할 수 있다”던 기존입장에서 일보 진전된 반응이다. 그는 “당시 이슬처럼 간 혼령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후손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정부가 미발굴 독립유공자 찾기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취재=임민희 기자 mailto:기자bravo159@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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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8/25 [16:01]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









선조 독립운동자료 찾기가 독립운동하기 보다 어려운 현실/행정심판청구
글번호 : 15117          작성자 : 123456          작성일시 : 2009-08-29 오전 3:42:12              조회수 : 32



 
 
 선조 독립운동자료 찾기가 독립운동하기 보다 어려운 ..
 

 

 
 작성일: 2009/08/28 AM 07:06
작성자: 정병기(jbg1219)
 

 

 
 선조의 항일독립운동의 잊혀진 명예 찾기 위해 독립운동자료 찾기가 독립운동하기 보다 어려운 세상이라니?

kbs1 방송관계자님 관시 가져주시고 취재요청합니다.
억울해도 해도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안돼 행정심판으로 가려고 합니다.
지난해 2008년8월14일 시청자칼럼 프로에 출연하여 호소도 해보았습니다.

[kbs1 tv] 독립운동가 기록찾기 30년의 노력
방송일: 20080814 /동영상
우리들세상/시청자칼럼/다시보기 가능합니다.(출연자/정병기) highSpeedVod(1539806);

서울에 사는 정병기씨는 정씨의 증조부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시다 옥사하셨지만 근거자료가 부족해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씨는 근거를 찾기 위해 30년째 노력을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정씨는 증조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왔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증빙자료 발굴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호소한다.

[kbs1 tv ] 동영상

"당국, 수형자료 없다고 독립유공자 외면" 정부가 서둘러 나서야 할 때,
일제 강점기 경성형무소 사망기록(제정호적)제시해도 추기가료 요구하는 국가보훈처,야속하다.

[밀착취재] 미발굴 독립유공자들의 잊혀진 명예 ,중손자 30년 넘게 거증자료 찾아 전국 동분서주,
임민희 기자

▲지난 30년간 증조부의 항일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정병기씨 &copy; 임민희 기자
올해로 광복 63주년을 맞았지만 과거사 정리 작업은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독립적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광복 후 권위주의 통치시까지 항일독립운동과 해외동포사, 민간인 집단 희생 등의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을 진행하고 있기는 하다.

선조의 독립운동으로 집안은 풍비박산, 후손들은 가난과 무지 그리고 사리기 위해 머슴살이 전전,

그러나 역대정권마다 과거사 문제는 가장 껄끄러운 문제로 치부되거나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현 정권에서도 친일인명명단 공개와 관련해 “친일문제는 공과를 균형있게 봐야한다”한다거나 대일관계에서도 실리외교를 표방하며 “일본에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발언하는 등 과거사 정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이처럼 과거사 정리 작업이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친일파들은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반면 일제강점기 시대에 항일운동을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한 채 과거 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이들을 외면하는 동안에도 미발굴 독립유공자들의 행적을 찾기 위해 지난 30년을 추적해온 이가 있다.

정병기(51)씨는 증조부인 정용선 선생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이 잡듯 뒤져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에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찾아냈고 주변인들의 증언을 확보했다. <사건의내막>은 정병기씨를 만나 정용선 선생의 독립운동 발자취와 지난 30년간 동안 고군분투했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씨 “증조부는 일제시대 군자금 모금 벌이다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숨졌다. 제정호적과 주변인들 증언 등 항일운동 행적 드러났음에도 보훈당국은 외면…수형인 명부 정부에 의해 소각돼” 분개

“증조부는 일제시대에 군자금 모금 운동을 한 혐의로 악명 높은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숨을 거뒀다. 이는 일본형무소장인 제정호적에 기록돼 있다. 증조부로 인해 우리 집안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일가족들이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파냈고, 증조모를 개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곧 발각돼 증조모는 굶어 죽었고, 조부는 탄광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전전하다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등 기구한 인생을 사셨다. 제정호적과 주변인들의 증언 등 증조부의 항일운동 사실이 명명백백한데도 보훈당국은 구체적인 죄목이 적힌 수형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 30년을 하루 같이 증조부의 항일행적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온 정병기씨는 “광복 63주년이 무색할 만큼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발굴작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독립운동가들의 자료를 보존하고 발굴하는 것은 국가의 몫인데 그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직접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성토했다.

정씨가 증조부의 명예회복에 이처럼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다분히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는 경찰관으로 복무하던 중 1980년 강도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칼에 찔려 국가유공자인 상이군경회원으로 연금을 받고 있다. 더욱이 증조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증손자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

정씨는 “증조부님의 행적을 찾아다니면서 보상금 때문이라는 둥, 미쳤다는 둥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그간 마음고생을 털어놨다. 그는 “솔직히 경제적으로 힘들게 사신 아버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증조부의 명예회복”이라며 “한국의 진정한 독립은 이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발굴이 이뤄질 때 참의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신념을 피력했다.

▲정씨의 민원제기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답변 &copy; 브레이크뉴스
▲봉화군은 증조부의 수형인 명부가 형의실효등에관한법률에 의해 폐기됐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copy; 브레이크뉴스

그가 증조부인 정용선 선생의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선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조상들의 성묘조차 갈 여건이 안됐지만 정씨의 아버지는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를 데리고 경북 봉화군에 있는 묻혀있는 증조모에게 성묘를 갔다. 그러나 증조부의 산소가 없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고 아버지로부터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 투옥된 후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어린 나이였지만 막연하게나마 증조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증조부를 찾기 위해 친인척들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 상황을 물었고 기구했던 가족사를 알게 됐다. 친인척들 및 주변인들의 증언과 30년간 증조부의 발자취를 찾아다닌 끝에 그가 밝혀낸 정용선 선생(1883년~1928년)의 행적은 이렇다.

정용선 선생은 1883년 12월17일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의성, 풍기, 울진, 영덕, 영주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만주에 있는 독립군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돈은 척곡교회(1909년 설립, 2006년 6월19일 등록문화재 제257호로 지정) 창립자 김종숙 목사와 논의해 독립군에게 보냈다.

그러던 중 당시 거부들이 모여 살았던 충북 청주군(현 청원군) 양석면 도원리에서 만석군의 집을 털다 발각돼 1년 만에 다시 경북으로 도망을 나왔다. 그러다 1916년 갑자기 종적을 감췄고 10여년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이 날아왔다.

정씨는 “친인척분들이나 주변인들 모두 증조부님이 군자군 모금 운동을 했다고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며 “당시 경성형무소는 항일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이 투옥된 던 곳으로서 고향이 경북인 증조부가 경성으로 압송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항일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군자금 모금 운동의 근거지였던 척곡교회의 김종숙 목사의 손자 김명성(83)씨도 “조부로부터 정용선 선생과 함께 군자금 모금활동을 한 바 있다고 들었다”고 인우사실 증명서를 써줬다고 주장했다. 김명성씨는 인우사실 증명서를 통해 “척곡교회는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의 비밀 결사 장소로 활용되었다. 군 자금 모금은 관내 친일파나 지역거부들의 집이 대상이었는데 야간에 침입해 금품을 강탈, 폭력을 행사하여 수탈하였고 소나 가축 등 금품환전이 가능한 모든 것들이 대상이었다고 조부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말했다. 또한 김씨는 정용선 선생이 군자금 모금 운동은 물론 일본군과의 항일 전투에 참가해 싸우던 중 체포됐다고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정용선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군 자금 모금 과정에서 일제 헌병과 경찰과 수차 격돌한 바 있고 관공서 습격과 방화 등을 수시로 시도했다고 한다.

또한 의병대장 석태산과 함께 재산전투에 참가해 동지들과 전투를 직접하며 항전했다는 것. 그러나 물자부족과 병력의 열세로 패해 후퇴, 석태산 의병장 가족은 강원도 평창 사거전 교회로 피신시키고 석태산, 정용선, 김명림 등 잔여병력은 소백산으로 이동 침입하여 병력을 재정비했다고 한다. 이후 군자금 모금 운동을 계속하던 중 일본군의 간교(만나 협상 요청)에 의해 협상장에서 체포되어 석태산 의병장은 현장에서 처형당하고 정용선은 소백산에서 체포돼 경성으로 압송된 후로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김명림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0년을 복역하고 만기 출소 후 독립운동본거지인 척곡교회로 돌아와 조부와 함께 거주한 사실이 있다고 전했다.

김씨는 정용선 선생의 가족 상황에 대해서도 소상히 증언했다. 그는 “정용선의 가족들은 일제의 모진 박해와 고문으로 어려움을 겪은 바 있고 정용선의 처에 대해 집안 일가친척의 주선으로 개가하였다는 사실을 인근 주민으로부터 듣고 확인했다”고 말했다. 정용선 선생과 달리 김명림씨는 수형인 명부에 기록이 남아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정부가 독립유공자 발굴해야”

▲척곡교회 창립자 김종숙 목사의 손자 김명성씨가 써준 인우사실 증명서(왼쪽) .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일제시대 제정호적(오른쪽) &copy; 브레이크뉴스

정씨는 김명성씨의 증언처럼 증조부의 항일운동 여파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일제는 수시로 찾아와 감시와 고문 등의 탄압을 일삼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집안어른들이 증조부를 족보에서 파내고 증조모의 이름을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고친 후 야밤에 40리 떨어진 인동장씨 집안으로 개가시켰다는 것. 그는 그 근거로 인동장씨의 호적에 기록된 증조모의 이름 ‘정열이’를 제시했다.

정씨는 기구했던 가족사를 설명해 나갔다. 증조부는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으나 딸은 병으로 죽고 아들(조부 정덕수)은 증조모를 따라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인동장씨 집안은 모진 박해를 받았고 증조모는 초가집에 감금되어 굶어죽었다. 조부는 집을 나와 큰아버지집 근처의 광산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에서도 여전히 일본군의 엄한 감시를 받았다. 조부는 결국 광산에서 일을 하다 폐병으로 사망했고 당시 7살이었던 아버지(정건순)는 5살인 남동생을 데리고 남의 집 머슴살이와 공사판을 전전하다 어머니를 만나 데릴사위로 들어가 살게 됐다는 것이다.

정씨는 “아버지는 배움이 없어 글을 모르신다. 증조부를 시작으로 계속된 일제의 탄압은 해방된 오늘날까지도 깊은 생체기가 되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며 “이는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친일파 후손은 부와 권력을 누리고 독립유공자 후손은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는 부조리한 현실 때문”이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이러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자 오랜 세월동안 물불을 가리지 않고 증조부의 행적을 추적해갔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정씨는 지난 30년간 증조부의 활동근거지로 알려진 경북 봉화군 일대의 모든 면사무소를 비롯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경찰관으로 복무하는 도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수 십리를 오가며 기록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결과 10년이 흐른 후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과 당시 봉화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인 독립군 명단을 입수했다. 또한 증조부 생존 당시 소년이었던 90대 노인의 증언도 확보했다.

보훈처 “독립운동 사실 검증돼야 서훈 추서”

그러나 보훈당국은 “구체적인 죄목이 담긴 수형 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정씨는 포기하지 않고 1989년부터 수형기록을 찾기 위해 법무부와 경찰청,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관련자료가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이에 봉화군에 증조부의 수형기록을 요청했고 “수형인 명부는 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폐기됐다”는 답신을 받았다. 정씨는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담긴 중요한 자료를 어떻게 국가에서 소각할 수 있느냐”며 “정부가 자료를 없애놓고 그 후손보고 그것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법무성과 미국 국무부 문서보존소에 도움을 요청,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보내 수형인 명부가 들어있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지불하고 구입했다. 그러나 증조부의 항일행적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2005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증조부의 독립활동을 인정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으나 이 역시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답변만 할 뿐이었다.

정씨는 “정부는 미발굴 독립유공자에 대해 관심이 없지만 이분들의 땀과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며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개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다. 국가가 계속 외면한다면 향후 행정소송 등 법정싸움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정씨의 ‘정용선 선생 독립운동 관련 자료발굴과 재신 요청에 대해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관계자는 지난 7월28일 공문을 보내 “정용선 선생에 대해 자체적으로 현지조사를 시행하고 자료를 수집해 2009년 3?1절 계기심사에 부의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결과는 내년 2월말 경 통보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30년간 “객관적인 자료가 검증돼야 서훈을 추서할 수 있다”던 기존입장에서 일보 진전된 반응이다. 그는 “당시 이슬처럼 간 혼령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후손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정부가 미발굴 독립유공자 찾기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취재=임민희 기자 bravo159@naver.com
 

 

 
 파일: [ DSCN0121.jpg (168KB)]



 

 


 

 


지난 30년 세월을 증조부 독립운동 자료 발굴을 위해 노력했지만 국가보훈처가 인정하지않아 억울한 사연을 행정심판청구를 통하여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국무총리실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제기했습니다. 소장을 포함한 서류 400여장 분량에 관련 동영상 자료(2008.8.14. kbs1 시청자칼럼) 소장에서 항일운동으로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던 중 병사로 독립유공자를 인정하여 잊혀진 명예를 회복시켜달라고 재판부에 호했습니다. 이제 국가보훈처인 피청구인과 청구인간에 열띤 공방이 전개 될 것입니다. 아마도 정부의 독립운동 관련 서류가 영구보존문서임에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귀책사유가 도마위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kbs1 tv
방송일: 20080814 
kbs1 tv 우리들세상/시청자칼럼/다시보기 가능합니다.(출연자/정병기) highSpeedVod(1539806); 
 
서울에 사는 정병기씨는 정씨의 증조부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시다 옥사하셨지만 근거자료가 부족해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씨는 근거를 찾기 위해 30년째 노력을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정씨는 증조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왔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증빙자료 발굴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호소한다.

 
[kbs1 tv ] 동영상 /증조부(정용선 선생)1928년5월20일오후3시15분 경성형무소 옥사 작성자 : 퍼옴 
 
 국무총리실 행정심판위원회 억우한 사정 행정심판청구
작성일 : 2009-07-22 23:35:28  |  조회수 : 70 
 
 
 
  작성자 : 퍼옴 
 
 
작성일 : 2009-07-22 23:35:28  |  조회수 : 70 
 
 

저화질 영상이라 흐립니다


마우스 좌 더블 클릭: 전체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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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뉴스 후의 노력으로 저의 증조부님 명예를 꼭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증조부님의 한도 풀어드리고 했으면 합니다. 환번으로 끝나지 ㅇ낳는 문화방송 뉴스 후를 믿고 싶습니다. 시청자드림 
6.  정병기  2009.12.25 08:38   
서울신문 2006년8월14일 (연합뉴스 제공) “정부서 관련자료 불 태우고 입증하라니요” 증조부 독립운동 밝히려 30년 고군분투 정병기(51)씨 “정부가 증조할아버지의 서류를 모두 소각했는데, 이제와서 서류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준다고 합니다.” 정병기(49)씨는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무형무소)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30년 가까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일가친척과 이웃의 증언을 토대로 “증조부 정용선(1883년생)선생이 1900년대 초부터 1916년 즈음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정씨에 따르면 증조부는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췄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이 날아왔다. 정씨는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정부가 요구하는 서류를 찾아 고향인 봉화군에 증조부의 수형기록을 요청했지만,‘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기록을 소각했다.’는 어이없는 답변만 돌아왔다.”면서 “서류를 태운 정부가 서류를 요구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정씨는 “독립운동가의 자료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것은 정부의 귀책 사유인데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집안이 가난해 문맹으로 살아야했던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대부분의 독립투사 후손이 무지하다는 것을 정부가 악용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이제는 정부가 관리를 소홀히 한 귀책사유가 있는 만큼 정부가 반증을 해야 할차례가 아니냐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정씨 주장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객관적인 자료가 검증이 돼야 서훈을 추서할 수 있다. 정부에서도 정씨 증조부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으나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제공 
5.  정병기  2009.12.25 08:38   
"내 증조부는 당당한 독립군이었소" 매일경제 기사전송 2006-08-14 17:26 관심지수 8 관심지수 상세정보 최소 0 현재 최대 100 조회 댓글 올려/내려 스크랩 도움말 닫기 글씨 확대 글씨 축소 매년 광복절 때면 독립운동의 발자취와 가슴 아픈 식민 통치의 기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지만 정작 그런 영광과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정을 못 받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영광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해 줘야 할 정부가 팔짱 끼고 있는 사이, 정부 대신 과거의 흔적을 찾아 나선 후손들이 있다. 두 사람을 만났다. ■ 
4.  정병기  2009.12.25 07:56   
mbc 뉴스 후 제작팀 꼭 사연에 대하여 관심 가져 주시고 취재 좀 하여 주셨으면 하는 것이 새해 소망입니다. 반드시 증조부님의 올바른 족구사랑의 명에를 찾아야 합니다. 도움 좀 주시기 바랍니다. 국가보훈처의 철밥통 관행이 사라져야 하며 안일한 보훈행정의 인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전환점이 될수 잇게 관심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어디 말도 안되지않습니까? 동영상 사진 관련 글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32년이 헛되지않게 해주십시요 
3.  정병기  2009.12.23 19:23   
저희는 국가를 위해 증조부님 아버지는 군대에서 닻시고 저 또한 경찰에서 강도범잡다 다치고 저의 아들도 의경으로 데모막다 다쳤고 그런 집안입니다. 모든 것을 국가를 위해 받쳤지만 현실이 이렇습니다. 
2.  정병기  2009.12.23 19:21   
행정심판 접수일/2009.8.28. 접수번호 행심-2940 소장 포함 400페이지 분량/동영상자료 제출했습니다. 문화방송 뉴스 후에서 꼭 좀 취재 부탁드립니다. 모든 자료를 공개해 드리겠습니다. 
1.  정병기  2009.12.23 19:17   
현재 국무총리실 산하 행정심판위원회에 억울한 사정을 행정심판을 청구하여 진행 중에 있습니다.문화방송에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 주실것을 거듭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이러한 억울한 일은 없어야 하며 일제강점기에 항일독립운동을 하시다 형무소에서 옥사한 사실이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없어진 자료를 요구하고 있는국가보훈처의 부당한 요구는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힘없고 구너력 업쇼는 후손들 살수 있나요? 거듭 부탁드립니다.지난 32년을 노력한 증손자의 소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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