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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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세계의 임시정부 1
글쓴이 관리자
날 짜
05-06-24 10:12
조회(15023)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에서 시작된 독립의 여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4월 11일과 13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선포된 뜻 깊은 날이다. 1919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전 세계에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선포한 일은 암울하던 대한민국에 독립의 기운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여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올해 광복 6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의 수립과 그 활동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임시정부의 역사적인 의의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자 한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Korea provisional government)는, 1945년 환국할 때까지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역할과 임무를 수행한 민족의 대표기구였다.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과 시도는 일찍부터 있어왔다.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조소앙 등 17명이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임시정부 수립을 제창하였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후 1919년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부정하고, 민족의 절대독립을 요구한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3·1운동을 통해 표출된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한 곳으로 결집시키고, 이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킬 기구, 즉 임시정부의 수립이 요구되었다.
3·1운동이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과 4월 국내외 각처에서 모두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조선민국임시정부 · 신한민국정부 · 대한민간정부 · 고려공화정부 · 간도임시정부 등은 주체나 수립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채 전단으로만 발표된 정부이다.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와 한성 그리고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였다.
러시아에서는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로 개편,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상하이에서는 국내외에서 모여든 독립운동자들이 4월 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내외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한성에서는 13도 대표들이 비밀리에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고,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형식으로 ‘한성정부’의 수립을 세상에 알렸다.
노령 · 상하이 · 한성의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부터 통합을 추진하였다. 통합운동은 러시아 연해주측의 원세훈과 상하이측의 안창호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여러 차례 통합논의를 거쳐,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정부의 위치는 상하이에 둔다는 원칙에 합의를 이루었다.
노령 · 상하이 · 한성의 임시정부가 통합을 실현한 것은 1919년 9월 11일이었다.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결정되었고, 민주공화제를 표방하였다. 이것은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수립된 민주정부였다. 9월에는 제1차 개헌을 거쳐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였고, 이승만ㆍ박은식이 대통령을 역임했다. 이후 1926년 9월에는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를 채택하였으며, 이상룡ㆍ홍진ㆍ김구가 짧은 기간 국무령을 맡았다. 1927년에는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를 채택하고, 이동녕ㆍ김구 등이 중심을 맡았다. 1940년에는 1인 지도체제인 주석제로 전환하고, 1944년에는 좌우합작을 일구어내어 주석ㆍ부주석 체제를 갖추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임시정부의 활동을 살펴보자.

● 내정 : 교통국 · 연통제 · 민단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에 국내외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설치하고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해외 동포들의 자치행정조직을 임시정부의 산하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교민단제를 발표, 대한교민단(상해대한인거류민단)을 두었다.
교통부 내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交通所)를 신설하였다. 주된 활동으로는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문서 국내 전달, 인물 발굴 및 무기수송 등을 담당하였다. 연통제에 따라 서울에 총판을 두고 각 도·군·면에 독판·군감·면감을 두었는데, 국내에는 9개도 1부 45개 군에 조직을 두고 만주에는 3개 총판부가 있었다. 연통제의 업무는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 모집, 시위운동 계획, 애국성금 모집운동 등 다양하였다. 임시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은 주로 국내 서북지방에 집중되었고,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중부 이남에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을 비롯한 국내 비밀조직이 그 임무를 대행하였다. 그리고 상해 민단은 자치기관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단체이자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의 지방행정기관과 지방의회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 재정
정부 수립 초기에는 국내로부터의 재정지원이 활발했다. 점차 일제가 그 공급선을 차단하자, 미주지역을 비롯한 국외 동포들의 의연금과 인두세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에는 비로소 중국국민당 정부가 지원에 나섰고, 중국인 개인과 민간기구의 지원금도 큰 도움이 되었다.

● 교육 · 문화활동
임시정부는 인성학교를 경영하여 동포의 자제들을 교육시켰으며, 기관지《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또한 미주지역에서《Korea Review》를,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각각 발행하여 미주와 유럽에도 한국의 독립의지와 활동 내용을 알렸다. 관보 성격을 가진 《공보(公報)》를 발행하여 정부로서의 명령과 조례 등도 발표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임시사료편찬회’를 설치하였다. 편찬회에서는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 4권을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특히《한일관계사료집》은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개최되는 국제연맹회의에 제출하기 위한 것으로, 한민족의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역사적으로 밝히고 있다.

● 외교활동
임시정부 초기의 외교 활동은 대미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종전기에는 대중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던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움직이게 하고, 1920년대에는 워싱턴회의와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민족독립의 기회를 삼으려 했다. 또 1920년 10월에는 신규식을 광동(廣東)의 손문이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하여 지원을 확보하였다.
1932년 이후 임시정부는 주로 중국국민당 정부와 교섭하여 지원을 받았으며, 1940년대에 들어서는 중국공산당과도 연결망을 확보하였다. 무엇보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된 것은 국외의 주목을 받았다. 이것은 열강회의에서 식민지의 독립이 승인된 유일한 사례로,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한 국제적 인정이었다. 다음으로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은 다시 확인되었다.

● 군사활동
임시정부는 1919년 말부터 군사활동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해 나갔다. 1919년 말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후 비행사양성소·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이후 연통제와 교통국의 와해로 임시정부가 침체기로 들어서자, 적은 인원과 자금을 가지고 결행할 수 있는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예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이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도쿄의거는 실패하였으나,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의거는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최고급 지휘관들을 처단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 임시정부의 존재뿐만 아니라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었으며, 중국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지금까지 대략적이나마 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 각 활동에 대해 짚어보았다.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거 직후 일제의 보복을 피해 중국 내륙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綦江, 1939)·충칭(重慶, 1940) 등으로 청사를 옮기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임시정부는 환국하여 국민의 손에 정부를 넘기고 정식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41년 11월에 마련해 둔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그들이 수립하려던 국가와 정부의 모습을 담아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점령국이었던 미국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우자, 임시정부는 정부조직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은 임시정부의 환국을 환영하였으나, 남북으로 나뉘어 들어온 미ㆍ소 점령국의 정책과 국내의 의견 분리로 말미암아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그대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이후 임시정부가 건국강령으로 마련해 두었던 지도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헌법으로 계승되었으며, 이것이 오늘에까지 이어져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한번,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며 치열하게 전개된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서 우리 민족의 주체의식과 민족의식을 성장시킨 대표적 민족기구라 말할 수 있겠다.

* 참고자료 :
「대한민국임시정부 약사」
김희곤,『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지식산업사, 2004.
한시준,「대한민국임시정부」,『한국독립운동사사전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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