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열 ㅣ 상지학원 이사장·전 국사편찬위원장

 


 


평소 같으면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이런 글을 쓸 엄두도 못 낸다. 미국의 눈치 때문이 아니라 미국을 언급하기만 해도 이런저런 딱지를 붙이는 세력들 때문이다. 미국은 그들의 성역, 언급하기만 해도 눈을 부라리고 비판에는 욕설이 낭자하다. 그러나 ‘방위비 분담금’ 인상 문제는 한국인의 대미의식을 놀랄 정도로 변화시키고 있다. 트럼프는 한국의 식자나 언론이 도저히 할 수 없는, 미국의 실체를 한국인에게 확실하게 교육해 대미 환상을 깨트려주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에게 고마운 뜻을 전하고 싶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계속되고 있는 제11차 방위비 분담에 대한 협상은 14일 여섯 번째로 회합했다지만 결과를 듣지 못한 채 이 글을 쓰고 있다. 11차 협상에서 미국 측이 제시한 금액은 제10차 분담금액(9억달러 규모)의 5배가 넘는 50억달러(6조원), 미국의 이런 청구서는 아무리 미국에 호감을 가진 한국인이라 해도 의아해한다. 대미 찰떡 공조를 강조하는 극우세력도 평소와는 달리 아직 언급이 없다. 내심 반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다 트럼프는 지난해 2월 각료회의에서 “전화 두어 통으로 한국이 5억달러를 더 내기로 했다”고 말했고, 최근에도 되풀이했다. 지난해 8월에는 한국이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야 한다면서, “브루클린 임대아파트에서 월세 114달러13센트를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달러 받기가 더 쉬웠다”고 기고만장한 적이 있다. 이것은 비아냥이고 멸시다. 거래꾼에게나 통할 이런 모멸적 언사는 아무리 미국에 호의적인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날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주한 미국대사의 이해 못할 언행도 한몫했다.

 







 


올해 6·25 70주년을 맞는 한국인은, ‘자발적 대미노예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미국에 대해서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필자도 어려서 한국전쟁을 경험한 탓인지 특히 미국 병사들의 희생에 유념했고, 여행 중에는 하와이와 알링턴의 국립묘지를 돌아보면서 강한 부채의식을 느꼈다. 한국전을 회상하는 이라면, 미국이 천문학적인 전비를 쏟아붓고 3만6천여명의 미국 젊은이가 전사했던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다. 휴전 후에도 군수 지원은 계속되어 필자가 입대했을 때만 해도 우리 군은 미국이 조달한 군수물자로 유지되는 것 같았다. 휴전 후 미국의 원조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세계 10위권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게 필자를 포함하여 나이 든 한국인들이 가진 거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 요구는 미국에 대한 이런 감사를 흔들어 놓는다. 나 같은 겁쟁이에게도 미국의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부채질한다.

 


전문가들은 1991년부터 시작된 ‘방위비분담금협정’ 자체가 주둔군의 모든 경비를 미국이 부담한다는 ‘주한미군지위협정’(소파 협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2019년 방위비 분담금 1조389억원(약 9억달러)은 주한미군 고용 한국인 노동자 인건비, 군사건설비, 군수지원비 등 세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미국이 50억달러를 요구하면서 이 기본 틀이 완전히 무너졌다. 트럼프가 제시한 50억달러에 맞추기 위해 미국이 새로운 항목 신설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양측이 확인하고 있다. 미국의 요구대로 한다면 2020년 기준 주한미군의 1인당 인건비는 약 8800만원이고, 군무원 인건비는 1억3천만원이 넘는데 사실상 이 인건비를 한국민 혈세로 주게 된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한국이 부자 나라라고 치켜세우지만, 한국은 아직 연 2000만원 남짓한 최저임금 일자리도 제대로 못 만드는 형편이다.

 


미국의 요구에는 ‘준비태세’(readiness) 비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군의 거의 모든 측면을 포괄”한다는 준비태세 항목이 신설되면 미국에 ‘백지수표’를 쥐여주는 것과 다름없게 된다는 게 전문가의 우려다. 그들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한반도를 방어하기 위한 큰 틀의 노력’이기 때문에 그런 ‘신설 항목’을 만들자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한국이 본격적으로 끌려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유영재) 10차 협상 때 한국인 52%가 미군이 감축되더라도 방위비 분담금 증액에 반대했고, 11차 협상 때는 국민의 96%가 방위비 분담금을 증액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촛불민중혁명에 의해 세워진 정부가 취할 태도는 분명하다.

 


방위비 분담금 문제는 한-미·북-미 관계의 현재를 점검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미국은 한반도의 핵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진정’ 갖고 있는가. 나는 의심한다. 싱가포르 합의를 여러 조건을 걸어 뒤집는 대신 단계적 상호 이행을 서로 확인해가는 것이 비핵화의 현실적 대안 아닌가. 소파 협정은 한국의 품위를 유지해주고 있으며 불평등한 조항은 없는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그리고 남북 철도·도로 연결 사업을 유엔사가 가로막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를 관철했어야 했다. 전시작전통제권을 넘겨준다지만 유엔사를 통해 한국군을 계속 작전 통제하려는 것은 아닌가.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는 한 전문가는 “한-미 동맹 약화나 해체 또는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로 한국의 안보가 불안해질 것을 우려한다면 미국과 중국이 포함되는 동북아시아나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미국 하원 군사위원장 애덤 스미스는 방위비 협상 중이던 지난달 4일 주한미군의 주둔 이유를 “남한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고 사실상 가장 중요한 목적은 미국의 국가 안보 증진이다”라고 행정부에 편지를 보냈는데, 이 내용이 그만의 주장일까. 또 방위비 분담을 50억달러로 올리지 않으면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한 트럼프의 뒤통수에 대고 미국 하원은 주한미군을 2만8500명으로 유지한다는 국방수권법(NDAA)을 통과시켰다(최필수). 따라서 ‘미치광이 협상술’을 구사하며 500% 증액을 요구하는 트럼프를 향해 “주한미군은 북한의 남침을 막기보다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역할과 임무를 맡고 있으니, 미국이 기지 사용료까지 내며 머물든지 아니면 철수하라”(이재봉)는 식의 한국 측 협상 결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방위비 분담금 문제의 본질은 국방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전시작전권까지 외국에 ‘헌납한’ 외세 의존성에 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방위비 분담금 압박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 트럼프가 미국 군대를 빼겠다고 협박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자주성과 국방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된다. 이제 더 이상 방위비 분담금 문제로 외국에 매달리거나 국가의 체면을 구기지 말자. 화해, 평화의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며 선진들이 염원했던 자주독립 통일의 꿈을 다시 회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