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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⑪서로 이용한 미군정·경찰 -경향신문
글쓴이 관리자
날 짜
18-06-18 10:00
조회(863)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610213200… (295)

ㆍ쌀 수집 반발 ‘대구폭동’ 원인은 미군정과 친일경찰이었다





창문이 깨진 YMCA 건물. ‘한국의 소리’ 신문은 좌익 학생들이 모임을 갖는데, 극우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습격해서 수십만엔의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 사진에 “경찰은 왜 이들을 체포하지 않는가”라는 논평을 달았다.

창문이 깨진 YMCA 건물. ‘한국의 소리’ 신문은 좌익 학생들이 모임을 갖는데, 극우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습격해서 수십만엔의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 사진에 “경찰은 왜 이들을 체포하지 않는가”라는 논평을 달았다.






미군정에 뜨거운 감자는 이승만만이 아니었다. 경찰 역시 그러한 존재였다. 1946년 가을 대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이를 ‘추수폭동’이라고 불렀다.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미군정의 쌀 수집에 반대하는 농민과 시민들의 집단 행동이 발생한 것이다.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이 시위 도중 사망했다. 박상희의 딸은 김종필과 결혼했다. 박상희의 친구인 황태성은 5·16 쿠데타 직후 남한에 박정희를 만나러 왔다가 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다.




[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⑪서로 이용한 미군정·경찰



미군정은 당황했다.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한국을 지원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독립정부를 세우러 왔는데, 미군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니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전 세계적으로 지원해야 할 곳이 많은데, 그 와중에 중요도가 떨어지는 한국에서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도와주고 뺨 맞는 꼴인가? 미군정은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대구와 경북의 공무원들은 물론 서울에 있는 경찰과 주요 중도파 정치인들도 이 조사에 함께 참여했다.


농민 등 반발 전국적으로 번져 
친일 경찰 실명 거론 축출 투서
고문·불법 구금·강탈에 항의
 


조사 결과 이 사건은 두 가지 원인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진단되었다. 첫째로 쌀 수집 문제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전쟁 시기 강제로 쌀을 걷어갔다. 미군정은 자유시장 정책을 쌀 수급에도 같이 적용했다. 한국인들은 이제 쌀 공출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자유시장이 시작되자 다음해 봄 차익을 노린 일부 몰지각한 상인들의 매점매석이 시작되었고, 쌀의 심각한 공급 부족과 이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미군정은 다시 쌀 수집을 시작했다. 공급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방으로 공출에서 벗어나 이제 좀 먹고살 만해질 수 있을까 하는 시점에 다시 쌀 수집이 시작됐으니 농민들의 반발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친일경찰의 문제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 노릇을 했던 경찰들이 해방 공간에서 다시 경찰로서 권력을 휘두르면서 쌀 수집에 나섰던 것이다. 38선 이북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쫓겨난 친일경찰들 역시 38선 이남에 자리 잡았다. 미국으로서는 친일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경찰로서의 업무능력이 채용의 가장 큰 기준이 되었다. 특히 반공정책이 필요했던 미군정의 이해관계와 독립운동을 했던 공산주의자들을 ‘공비(共匪)’로 때려잡으면서 그들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경찰의 경험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1946년 가을 발생한 대구 ‘추수폭동’의 본거지였던 대구시 태평로 대한통운 건물.

1946년 가을 발생한 대구 ‘추수폭동’의 본거지였던 대구시 태평로 대한통운 건물.





이때 그 유명한 프로잡(Pro-Job), 프로잽(Pro-Jap) 논쟁이 나오기도 했다. 경찰의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일본 제국주의에 복무한 경찰은 ‘친일의 프로잽’이 아니라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프로잡’이라고 주장했다. 


직분에 충실히 종사하는 과정에서 붉어진 독립운동가 탄압 문제를 경찰 모두에 적용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지나가는 개도 웃을 말이었다. 직분에 충실한다 해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문할 수 있는가? 물론 총독부 직원이었다고 해서 다 친일파로 간주하면 안 된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군수 중 군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총독부 경찰과 일본 제국군 장교의 경우에는 일반 하위 관료들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 해도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경찰에 대한 항의는 광범위했다. 친일경찰의 인명을 정확히 명기해서 이들을 경찰로부터 내쫓아야 한다는 투서도 이어졌다. 특히 다양한 정치인들을 접했던 버치에게 들어오는 경찰 관련 민원은 끝이 없었다. 불법적인 연행과 체포는 물론 고문과 불법 구금이 자행되었다. 경찰들의 문제는 크게 몇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로 중도파나 좌파 정치인들에 대한 탄압 문제였다. 여운형의 경호원들은 수시로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여운형을 경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운형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를 심문하는 것 같았다. 1946년 3월1일에 자행된 여운형 경호원 불법 연행에 대한 청원서들이 버치 문서군에 포함되어 있다. 여운형이 암살된 뒤에 경찰은 암살범과 그 배후를 조사하는 것보다 여운형이 타고 있었던 차의 운전사와 경호원을 체포해 조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버치 문서군 박스 3과 4).


그러니 최고 지도자가 되었으면 한다는 미군정의 제안에 대해 ‘이승만 계열이 경찰과 공무원들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이 박해를 받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면서 김규식이 이 제안을 거절했던 것도 너무나 당연한 처사였다(1947년 4월8일자 ‘김규식과의 만남’ 버치 문서군 박스 5). 김규식은 공정한 시스템이 보장되지 않는 한 자신에게는 기회가 없다는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 핵심에는 경찰 문제가 있었다. 


경찰에 의한 체포와 취조 과정에 대해 버치에게 제출된 고발장의 하나를 보자.


‘이놈, 폭동 이루려고 계획하지 않았어? 아무 말도 없이 지냈습니다. 폭동 일으키려 무기를 감춰둔 것이 있다드라, 이놈아. 너무도 한심해서 입을 닫았습니다. 이놈아 여운형이 와 같이 있지? 여 선생님은 없습니다. 이놈의 자식 여운형이가 거기 오지 않아? 오셨습니다. 몇 번? 두 번 오셨습니다. 기일은? 한 15일 전과 10여일 전에올시다. 이놈아 그래 여운형이를 지키면서 무기가 정말 없어?(일본도 3자루와 권총 5개가 있다는 보도가 다 들어왔어.) 글쎄 무슨 보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금일 당장 뒤져보아서도 다 아시다시피 저는 모릅니다. 너 그러지 말고 순순히 물을 적에 대라. 나는 온 지도 얼마 되지 않고 또 보지도 못해서 모르겠습니다. 형사는 나의 머리카락을 잡아 흔들며, 네가 고집을 쓴다고 아 이 무기가 안 나올 줄 아냐? 지방에 순사들 같은 줄 알아? 이놈아. 여기 있는 (경기)도 형사는 적어도 7, 8년 경험은 다 가지고 있어. 벌써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다 알아. 네 마음에 들어갔다 나왔어. 응~ 이 자식 정 안 댈 테냐. 너 물 좀 먹고 댈 테냐. 모르니까 죽어도 대지 못하겠습니다. (중략) 이놈아 여운형이도 우리가 잡아다 조사할려면 해. 인민당 놈들 다 잡아다 죽여야겠다. 야 너는 또다시 여운형이한테 가기는 글렀어. 그러니까 어서 대. 너 대기만 하면 네 신변은 아무 일 없고 인민당 대표가 필요한 것이다. 대표고 하졸이고 나는 모릅니다. 형사는 너 그럼 정 안 댈테냐. 나중에 나오면 너는 총살이야 이놈아. 그래도 나는 모른다고 하니까 형사가 성을 내며 소사를 시켜서 그 무슨 바오락지를 가져오더니 나의 손을 꼼짝 못하게 매더니 나의 팔을 머리 위로 해서 뒤로 넘기기에 나는 그 흙물 묻든 마루에 주저앉았다. 그리하여 자빠지니까 막 물을 먹이기에 너무나도 숨이 차고 해서 외치며 말하기를 여보 나의 말을 신,용 못하겠으면 같이 온 백태우군한테 물어보시오 했더니 형사는 백군한테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왔는지 나의 손을 풀어가지고 2층으로 간 것이었다. 나는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악귀적인 일제에 관헌의 손에서 해방당하야 그 무섭고 강압적이었던 과거를 증오하며 삼천만 선두에서 이 나라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용감히 싸워야 할 신생 조선의 경찰관들이 이다지도 무질서하고 무정견하고 비인도적인 데 한편 놀래고 한편 슬픔을 금치 못했다.’(백낙승의 경호원 김순석의 진술, 버치 문서 박스 4) 


둘째로 경찰들의 불법적인 행위였다. 특히 경찰의 힘을 이용한 강탈이 문제가 되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경찰 내의 제보. 장택상의 지시로 부자들에 대한 강탈 행위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최근 지명된 사람은 방규한으로 25만엔을 냈다. 레커링 장군의 숙사 북쪽인 방기호 집 근처의 서양식 맨션에 살면서 친일파로 알려져 있고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 운좋게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연루되지 않고 살았던 보수주의자다. 처음에는 몇 주 전 기부를 거부했다가 체포되었다. 구속될 것이라고 했는데도 그는 돈을 내지 않았다. 경찰은 그에게 모임을 문제 삼기도 했고, 집을 수색하기도 했다. 집에서 미국 담배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담배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오래된 일본도가 나왔다. 그래서 그에게는 불법무기 소지죄가 적용되었다. 그는 풀려나기 전까지 40여일을 감옥에 있었다. 그는 결국 한국을 떠났다. 


두 번째 사례는 조준호이다. 그는 1946년 3월 2000만엔 펀드의 10명의 보,증인 중 하나였던 잘 알려진 백만장자이다. (필자주: 굿펠로의 공작으로 이승만의 정치자금을 지원한 돈이다.) 그는 장택상으로부터 10월1일 할당액이 10만엔이라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는 집에 현금이 없어서 일단 5만엔을 보냈고 나머지는 면제해 달라고 했다. 경찰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는 10만엔의 어음을 주었다.


직접 당사자들에게 확인을 하지는 않았다. 이런 얘기들이 계속해서 들어오는데, 제3자를 통해서 들어온다. 부자인 그들은 장택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증언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김현국의 사례는 이를 더 잘 보여준다. 그는 부자 보석상이다. 그는 지역 은행에서 보석들을 감정해주는 자문역할을 맡고 있으며 지난 20개월간 그를 알고 지냈다. 나는 지난주에 PX에서 산 은을 세공하기 위해 그의 가게에 들렀다. 그는 경찰의 모금원들이 매달 내는 돈을 수금하기 위해 방금 다녀갔다고 했다. 그는 이것은 상대적으로 얌전한 기부라고 했다. 서울의 상인들 사이에서 이런 식의 강요된 기부는 일반적이라고 했다. 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에게 600만엔 정도의 땅이 있었는데, 경찰 간부의 친구가 거기에 빌딩을 짓고 소유권을 뺏어갔다고 한다. 그는 어디에도 불평을 하거나 호소하지 못했다. 버치가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어디에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고 했으며, 그때까지 말한 것을 모두 부인했다. 




1946년 12월 미군정 식량행정처가 작성한 쌀수집 현황. 역설적이게도 소위 ‘추수봉기’가 일어났던 경상북도는 상대적으로 쌀수집 실적이 좋은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라북도가 3%도 안 되는 반면, 강원도 지역이 거의 100%에 육박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당시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다. 오른쪽 사진은  백낙승의 경호원 김순석의 진술 원문.

1946년 12월 미군정 식량행정처가 작성한 쌀수집 현황. 역설적이게도 소위 ‘추수봉기’가 일어났던 경상북도는 상대적으로 쌀수집 실적이 좋은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라북도가 3%도 안 되는 반면, 강원도 지역이 거의 100%에 육박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당시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다. 오른쪽 사진은 백낙승의 경호원 김순석의 진술 원문.





조병옥은 최소한 최근에는 이런 강탈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경기도경찰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CIC도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특별조사관이 임명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1947년 10월17일자, ‘경찰의 강탈’, 박스 2) 


미군정의 반공정책 필요성과 
경찰, 공비 잡은 경험 딱 맞아
군정은 정치인 탄압 등 눈감고 
경찰은 ‘반탁 쿠데타’ 막아줘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다. 최소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경찰의 세 번째 특징이 문제였다. 바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극우 테러 청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경찰 문제가 불거져도 미군정은 친일경찰들을 버리지 않았다. 왜? ‘반탁운동세력의 쿠데타 시도는 경찰이 군정에 충성하는 쪽으로 남음으로써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경찰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버치 문서 박스 3).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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