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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⑫‘한민당 코트’를 아시나요-경향신문
글쓴이 관리자
날 짜
18-07-10 12:17
조회(444)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617205900… (176)

ㆍ이승만을 뒷받침하던 한민당, 그러나 국민들 생각은 달랐다





19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실시된 첫 보통선거에서는 다른 정당은 불참하고 한국민주당만 참여했지만 전체 200석 중 29석을 얻는 데 그쳤다. 시민들은 한민당을 일제 치하에서 이익을 얻었던 기득권층으로 생각했다. 미군정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당시 투표장의 모습.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다.

19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실시된 첫 보통선거에서는 다른 정당은 불참하고 한국민주당만 참여했지만 전체 200석 중 29석을 얻는 데 그쳤다. 시민들은 한민당을 일제 치하에서 이익을 얻었던 기득권층으로 생각했다. 미군정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당시 투표장의 모습.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다.






미군정은 정치적 사안에 관계없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경찰밖에 없다고 믿었다. 1945년 12월30일 군정청을 마비시켰던 반탁운동 세력의 총파업에서 경찰만이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경찰이 있기에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운영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⑫‘한민당 코트’를 아시나요



경찰에게는 이승만밖에 없었다. 송진우도, 여운형도, 장덕수도 모두 암살되었지만, 이들이 암살되기 이전부터 경찰의 희망은 이승만이었다. 1952년과 1953년 유엔군사령부가 부산에서 한국군을 동원한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제거하고자 하는 작전을 세울 때에도 이승만은 이를 알고 있었다. 군 내에도 이승만에게 충성하는 세력이 없지 않았지만, 유엔군 사령관이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이 군을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이승만에게도 믿을 수 있는 물리력은 경찰밖에 없었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기간 동안 진정한 의미의 ‘경찰국가’가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이승만과 경찰의 관계만으로 그가 집권을 했던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김구의 조건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일 경력의 경찰들은 이승만과 함께 김구를 그들의 경력을 은폐할 수 있는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정하에서 각 지방의 경찰서에는 이승만과 김구의 초상화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미군정청에서 지방 경찰서에 두 사람의 초상화를 붙이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초상화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지방 경찰서의 중앙 벽면에 붙어 있었다. (콜로넬리 소령에게 보낸 보고서, ‘전라남도, 전라북도, 충청남도에 대한 정치상황 재조사 9월10일·16일’, 1947년 9월29일, 버치 문서 박스 2) 


버치의 문서군에 있는 1946년 이후 지방의 상황 변화에 관한 다양한 문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경찰과 청년단, 그리고 정치조직의 상황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1947년 3월의 조사 문건이 가장 눈에 띈다. (1947년 3월22일 사령관에게 ‘3월5일부터 20일까지 남한 지방의 정치조직과 지도자에 대한 보고’ H. Habson, advisor, Political Analysis section, 버치 문서 박스 2) 여기에서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는 아직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상황에 대한 보고 

한국의 정당 평가를 위해서는 왜 한국의 정당이 미국과 다른가를 이해해야 한다. (1) 한국인들은 3개 또는 그 이상의 정당들이 인민에 의해 자유롭게 구성된 상황을 경험하거나 관찰했던 적이 없으며, 표현의 자유 역시 없었다. (2) 현재 한국의 정치에는 정치적 책임이 없다. 사람들과 당원들은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책임져야 한다고 여기지 않으며 관리와 지도자들은 그들의 주장이나 행동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미군정 시대로부터 수십년이 지났고, 한국 사회는 그 기간 동안 수많은 정당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정치인들은 변하지 않는가?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국민들을 이용하고, 이들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 것 역시 전혀 변하지 않았다. 


‘2개의 캠프로 나뉘어 있다. 군정을 지지하는 것은 우익, 아닌 쪽은 러시아에 의해 이용당하는 쪽이다. 어느 쪽도 사회 개혁이나 경제 재건 또는 정치적 권리나 자유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항상 권력만을 생각한다. 서울과 평양의 정당 본부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시위에 동원하려고 하고 있으며, 상명하복의 구조를 갖고 있다. 노동자 농민의 복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으면서 소수 지도자의 특권과 권위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예외적으로 아주 잘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담장 위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 중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들이지만, 군사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한국 상황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갖고 있으면서 위험을 느끼고 있다.’




한국에서 미군정이 수립되었던 1945년 9월, 하지 사령관의 정치담당 고문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고무적인 사항은 해외에서 교육받은, 그러나 친일의 오명이 있는 소수의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문서를 국무부 장관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20개월이 지난 시점에서도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지방에서의 상황은 더더욱 그랬다. 


‘두 번째로 인상적인 사실은 미군 관계자들이 한국의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해 완전히 무지(또는 무시)하며 일반적인 미국 정치의 순진함과 언어적 장벽에 의해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군정 관리들은 우리 지역에서는 정치적 행위가 없다라고 알려주거나 공산주의자들을 눌렀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5개월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은 지하로 사라졌고, 한국인 관리, 사업가, 정치인들에 대한 조사와 토론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서울에서 온 미국인 관리가 자신들과 그들의 조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우쭐해했다.’



미군정의 정책 실패에 항의한 
1946년 가을의 ‘추수봉기’
노출된 좌파 제거의 기회였다
 


1946년 가을의 ‘추수봉기’는 지방에서 좌우익 사이의 세력관계가 역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서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상황을 조사한 대부분의 문서들은 1947년 이후 우익세력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지금까지 미군정 시기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1946년 가을의 봉기는 미군정의 정책 실패에 항의하는 전 사회적 차원에서의 의사 표시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각 지역에서의 좌파 조직이 대부분 노출되었고,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었다. 물론 서울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 위조지폐 사건으로 인해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수배되었으며, 일부 좌파 신문들은 발간이 금지되었다. 


‘100명 정도의 한국 정치인과 사업가들, 50명의 미군정 관리, 그리고 많은 노동자, 농민들과 인터뷰를 한 결과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상황을 알게 되었다. 

우익의 생각은 (1) 독립을 지금 원하며, 러시아인들이 미국인들처럼 신탁통치를 이해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반탁운동을 강하게 하고 있다. (2) 만약 군정이 현재의 정부를 망명 임시정부에 넘긴다면, 현재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있지만, 이 정부는 안정을 가져다줄 것이고, 이 그룹에 의해 조심스러운 계몽이 있은 후에 자유 선거가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가 북한을 포함한 모든 한국인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한다. 90%의 한국인들이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3) 우익은 북쪽의 50만 군대를 걱정하고 있으며, 미군이 러시아로 하여금 그 군대를 해체하거나 비슷한 규모의 남한군이 결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4) 우익은 극단적으로 민족주의적이다. 그들은 미군들이 한국인들을 배신했다고 느끼고 있다.’




운동장이 우익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좌익에 대한 얘기는 없다. 단지 북한에 50만의 군대가 있다는 거짓뉴스만이 돌고 있다. 1950년 북한이 남침을 할 때에도 북한 군대의 규모는 15만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더 주목되는 점은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크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서 임시정부는 김구만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아니었다. 이승만과 김규식 역시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여겨졌다. 


‘지방에서는 “한국민주당 코트”라는 농담이 있는데 좋은 털을 목에 두른 코트를 말한다. 이것은 일반사람들을 위해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대표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사진. 사진에는 과거의 회상에 젖어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는 그의 전통적 복장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설명이 달려 있다.

당시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대표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사진. 사진에는 과거의 회상에 젖어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는 그의 전통적 복장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설명이 달려 있다.





1948년 5월10일 한반도의 38선 이남에서 첫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지방의회를 위한 선거가 있었고, 1946년 말 과도입법의원들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도 있었다. 그러나 그 선거들은 간접선거였다.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냈거나 지방의 유지인 사람들만이 참가하였다. 1948년의 5월10일의 선거는 한반도 전체에서 실시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한국 역사상 첫 보통선거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선거에 한국민주당은 유일하게 정당으로서 참여하였다. 해방정국을 호령했던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독립당, 국민당 등은 개인적인 참여를 제외하고 정당 차원에서는 모두 불참했다. 한국민주당이 이 선거에서 프리미엄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 역시 이를 기대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사건을 미군정이 뼈아파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미군정 시기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면 미국에 우호적인 의원내각제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우익의 고집쟁이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1948년 5월10일 첫 보통선거 
정당은 한민당만 참여했다
그러나 득표는 12%, 참패였다 



목에 털을 두른 코트를 입은 
부자와 친일파 정당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승만과 
한민당은 별개로 생각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이며, 
여전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한국민주당은 참패했다. 득표율은 12.17%에 그쳤으며 전체 200석 가운데 29석을 얻는 데 그쳤다. 전체 의석의 15%에도 못 미쳤다. 정당도 아니었던 독촉국민회가 55석, 무소속이 85석을 얻었다. 한민당은 유일한 정당이었고, 다수당이었지만, 전체 의석의 20%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국회를 주도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민주당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상이 중요했다. 즉,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다는 ‘오명’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자산가들이 그 중심이 되었다고 여겨졌다. ‘한민당 코트’는 지방에서의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었다.


초기 한국민주당에는 김병로와 이인, 김약수와 원세훈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하였다. 해방 직후 독립운동가들이 한국민주당이라는 공간에서 친일 경력의 인사들과 손잡은 이유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당 내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국민주당은 계속 친일파 정당으로 인식되었다. 정당 마케팅이 실패한 것인가? 


한국민주당은 우익이었고, 이승만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세력이었다. 장덕수 암살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선거를 앞두고 한국민주당이 이승만과 갈라선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민주당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승만의 정치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을 서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한 지도자, 한국민주당은 친일 부자들의 정당. 특히 이러한 인식이 서울이 아닌 지방을 조사하는 문건에서 나왔다는 점은 1948년의 선거 결과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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