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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17)어떻게 음식을 확보할까-경향신문
글쓴이 관리자
날 짜
18-07-27 15:55
조회(656)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722212500… (234)


ㆍ먹을 쌀 없고 콜레라로 죽고…해방됐어도 삶은 여전히 팍팍했다







<b>북에선 토지분배, 남에선 쌀 수집</b>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은 됐지만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해방 공간에 들어선 국가는 한국인의 국가가 아닌 미군정이었고, 쌀을 비롯한 생필품 가격은 폭등했다. 사회적 불안 속에 호열자라 부른 콜레라까지 번졌다. ‘요즘 관심사가 무엇이냐’는 한 여론조사(1947년)에서는 ‘가족을 위해 어떻게 음식을 확보할 것인가’란 응답이 가장 많을 정도였다. 사진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토지분배를 받고 환한 표정을 짓는 당시 이북 지역의 노인(1946년·왼쪽)과 미군정의 쌀 수집 홍보 전단.  경향신문 자료사진

북에선 토지분배, 남에선 쌀 수집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은 됐지만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해방 공간에 들어선 국가는 한국인의 국가가 아닌 미군정이었고, 쌀을 비롯한 생필품 가격은 폭등했다. 사회적 불안 속에 호열자라 부른 콜레라까지 번졌다. ‘요즘 관심사가 무엇이냐’는 한 여론조사(1947년)에서는 ‘가족을 위해 어떻게 음식을 확보할 것인가’란 응답이 가장 많을 정도였다. 사진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토지분배를 받고 환한 표정을 짓는 당시 이북 지역의 노인(1946년·왼쪽)과 미군정의 쌀 수집 홍보 전단. 경향신문 자료사진






해방이 되었지만 정치는 혼란했고, 사회적 안전은 전혀 담보되지 않았으며, 생활필수품을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였다.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고, 그 국가는 국민들의 안전과 경제적 풍요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바람과 전혀 달랐다.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17)어떻게 음식을 확보할까



해방이 되고 들어선 국가는 한국인의 국가가 아닌 미군정이었다. 38선 이북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군사정부를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한국인들로 하여금 5도 행정국이라는 조직을 만들게 하고 이를 조정·감독했다. 소련군이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권력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군의 눈치를 보고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해방이 우리 스스로의 손에 의해 쟁취된 것이 아니라 외국군이 진주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에 의한 지배가 3년이나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미군정, 돈 찍어내 통치자금 메워 
물가 100배 넘게 올라 ‘천정부지’
쌀값 폭등에 쌀 수집·배급 정책
 


게다가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 진주한 군대에 충분한 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다. 양 강대국에는 한국보다 더 중요한 지역이 있었다. 미국에는 서유럽과 일본이 더 중요했고, 소련에는 동유럽과 전쟁으로 파괴된 자국의 서쪽 지역의 재건이 더 급했다. 그러다보니 미군은 군사정부를 수립했지만 이를 운영할 돈이 없었다. 사회는 혼란하고 일본인이 돌아간 이후 공장이 돌아가지 않으니 세금을 걷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통치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고 정부를 운영할 수는 없었다. 결국 돈을 찍어낼 수밖에 없었다. 물가가 1년 동안 100배 넘게 상승하는 통제 불가능한 인플레이션이 계속되었다. 


초기 상황은 38선 이북이 조금 나았다고 할까? 소련군은 그나마 일본이 남기고 간 물자를 약탈했다. 소련군은 유럽 전선에서의 싸움에 지쳐 있었고, 아무런 군수지원을 받지 못했다. 무질서가 계속되자 스탈린은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에 직접 명령을 내렸다. 약탈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엄중하게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약탈해 간 설비가 소련의 시스템에 맞지 않아 다시 가지고 오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소련군의 지원하에 권력을 장악한 38선 이북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은 경제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북쪽은 남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건이 좋았다. 식민지 시기 더 많은 산업시설이 북쪽에 있었고, 수풍댐과 비료공장이 있었다. 인구도 남쪽보다 적었다. 


그러나 남쪽은 혼란 그 자체였다. 자유시장을 표방한 미국으로서는 미군정이 설치된 지역에서 철저하게 경제를 통제할 수 없었다. 물자도 모자라고 통화량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38선 남쪽에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쌀을 비롯한 생필품 가격이 폭등했다. 쌀을 자유시장에 풀었던 미군정이 이를 취소하고 쌀 수집과 배급으로 정책을 바꾼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나라를 통치해본 적이 없는 군인들에게 한국의 상황은 생소한 것이었고,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버치 문서군에 있는 문서들에 의하면 당시 은행 이자는 매월 10%였다. 1년이면 100%가 훨씬 넘는 이자율이었다. 만약 복리로 계산이 되었다면 1년간 140%를 웃도는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은행에 저축을 하면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물가가 10배 이상 상승하는 상황에서 100%를 상회하는 이자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래도 정치인들은 정치자금의 일부를 은행에 예치해두고, 높은 이자를 즐기고 있었다. 1946년 7월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2000만엔’이라는 제목의 문서에는 정치인 중 한 사람이 원금 125만엔에 대한 이자로 매달 그 10%인 12만5000엔을 받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125만엔을 넣어 놓으면 1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275만엔이 되는 것이다. 물론 복리로 하면 더 받을 수도 있었다.


심각한 경제난·정치적 혼란 겹쳐 
민중들 최대 관심사 ‘음식 확보’
북한 토지개혁 소식에 들뜨기도
 


미군정은 1947년 지방을 조사하면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 ‘요즘 관심사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답변한 것은 ‘가족을 위해 어떻게 음식을 확보할 것인가’(65명)였다. 이 답변은 두 번째로 많은 ‘다가올 쌀 수집’(62명), 네 번째인 ‘하절기 곡물 수집에 대한 불평’(20명), ‘비료의 불충분한 공급’(7번째, 10명), ‘필수품의 불공정한 분배’와 ‘곡물 수송시설의 미비’(각 2명) 등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었다. 


정치와 관련된 관심은 ‘통일되고 독립된 한국 정부의 빠른 수립’(56명) 정도였다. 그 외에는 ‘김일성의 암살이 사실인가’(11명), ‘미소공동위원회의 진척’(5명) 정도가 정치적 관심이었고, 보스턴 마라톤에서 승리한 서윤복에 관심을 표명한 사람도 1명 있었다(1947년 8월20~26일 전북 조사, 1947년 9월3일자 문서, 버치 문서군 박스 2). 




버치의 일일 메모.

버치의 일일 메모. 





절대적인 쌀생산량이 부족하고, 일본으로부터 수 입되던 비료와 석탄이 끊긴 상황임을 감안하더라도 ‘음식의 확보’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는 것은 과연 해방이 한국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한다. 같은 지역에서의 조사에서 당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더 많은 비료의 공급’ ‘곡물 수집에 보다 자세한 데이터를 이용할 것’ ‘지역에 맞는 경제정책을 통해 더 나은 삶의 질을 보장할 것’ ‘식량을 농부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할 것’과 함께 ‘면직원과 경찰들이 좀 더 친절할 것’ ‘정치조직에 대한 의무적 참여를 없앨 것’ ‘부정 공무원의 척결’ 그리고 ‘농민 조직을 없애라’는 답변이 나왔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었건만 나아진 것은 전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한 북한에 대한 부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토지개혁 이후에 곡물 세금이 70%에 달한다는 것, 반탁운동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문, 김일성의 암살 등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소문과 관련된 관심도 있었지만, 38선 이남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토지개혁이었다. 일제강점기와는 다른 무엇을 희망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구체적 내용을 떠나 북의 개혁 소식은 마음을 들뜨게 했을 것이다. 


미군정의 관리이자 <주한미군사>를 쓴 로빈슨이 작성한 문서(‘군정의 대중과의 관계를 위한 정책 제안’, 1946년 4월2일자)에 의하면 ‘미국식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 때문에 흑인과 아시아인 같은 소수자의 권리는 무시되고 있다’고 전제하며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경제, 거대 산업의 정부 소유, 농지 분배’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소련에 대한 호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정책이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고 진단했다.


영양 부족해 각기병 등 질병 만연 
1946년엔 콜레라로 수천명 사망
“해방의 감흥은 사라지고 낙담만”
 


일반 사람들에게 닥친 또 다른 문제는 질병이었다. 미군정이 조사 중에 하남군에서 질병을 발견했다. “하남군은 상대적으로 후진 지역으로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었고, 질병이 있었다. 특히 피부병이 일반적으로 관찰되었다. 사람들이 ‘베리베리’(각기병)라고 부르는 병이 보였다.” 영양 부족으로 인해 비타민 B1 결핍이 각기병을 불러왔을 것이며, 이는 비단 하남군만의 현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군정에도 질병은 큰 문제였다. 지금까지의 미군정 시기에 대한 연구는 정치·경제적인 문제에 집중되었지만, 실상 사회적으로 질병의 만연은 정부의 능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있었다. 버치가 매일매일 작성한 일일 수첩을 보면, 정치적인 문제도 있지만 사회적인 내용들이 적지 않다. 특히 콜레라에 대한 버치의 메모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1946년 7월7일 홍수로 인명과 재산에 큰 피해. 1946년 7월11일 농업 인구가 80%로 측정됨. 1946년 7월13일 콜레라로 5500명 사망. 1946년 7월26일 남한의 큰 홍수로 인명, 재산 피해가 큼. 1946년 8월1일 10가지 음식이 하나의 캔에 들어 있는 레이션이 100엔에 한국인들에게 판매되기 시작. 1946년 8월4일 서울에서 8만8000개의 레이션이 팔림. 1946년 8월7일 9개의 가짜 반지가 경찰에 의해 적발됨. 1946년 8월9일 서울에 있는 장교들의 숙사에서 강도사건들이 발생. 1946년 8월31일 쌀이 다른 나라로 유출되고 있다는 잘못된 소문이 돌았다.” 


1946년 7월의 콜레라는 1938년 이래 최악의 전염병이었다. 당시 신문들 역시 이 콜레라의 심각성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에서 콜레라는 호열자로 불렸다. 


『“1945년 8월15일 조선 민족은 해방된 기쁨에 누구나 날뛰었다. 그러나 곧 실현될 줄 믿었던 독립국가는 해가 바뀌어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다 의외의 청천벽력으로 신탁통치라는 망측한 국제적 딱지가 붙으려 하였다. 그들은 지나오면서 때 아닌 놀라움을 몇 번이고 겪었다. 이에 따라 해방 즉시부터 지녔던 감흥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낙담과 원한만이 그들을 괴롭혔다. 거기에다 물가는 시시각각 뛰어오르고 해외에 있던 동포들의 귀환은 나날이 늘어가기만 했다.
 
이에 또 한 가지 불행이 더 늘었다. 그것은 역시 꿈에선들 예기치 못한 호열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도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산지사방으로 만연되었다. 남조선에 있어서만 하루에 몇 백명씩 죽어버린다는 말이 오가기도 했다. 그들의 원통한 주검은 목전에 절박한 감이 있었다. 그들은 떨었다. 그 지악한 병마에 걸려 죽어 없어질 것만 같아서 더욱 이 불안을 느꼈다. 

우리의 지도청년 R은 그동안 변동 많은 여러 가지 정세에 전 신경을 올렸다. 그런 중 또 이 호열자 통에 몇 때의 한 끼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했다. 어떤 것이든 그 속에는 호열자균이 버글버글 움직이고 있음을 보는 것 같았다. 어느 때인가 R은 그의 친구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어째 조선의 운명은 이리도 비참한가. 독립은 되지 않고 한참 누구나 민족운동을 전개해야 할 이때에 또한 이놈의 전염병으로 하여 인명에 위협을 주니 이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하였다.”
 
(경향신문 1947년 11월2일자)』




이 이야기는 의외로 싱겁게 끝난다. 위에서 이야기하는 청년은 의사의 진단 결과 콜레라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 일화는 당시 사람들이 콜레라에 대해 느끼고 있었던 두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정치는 국민들의 정서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이 정권을 잡는 데에만 몰두했다. 해방은 한국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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