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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신년기획]다·만·세 100년, ㅈㅗㅅㅓㄴㅁㅣㄴㅈㅗㄱㅕㅇㄴㅕㅇ…‘중국 그랜드캐니언’의 한글 묘비-경향신문
글쓴이 관리자
날 짜
19-01-15 10:01
조회(3975)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115060003… (1326)

무장투쟁의 성지 타이항산





중국 타이항산 스먼촌에 위치한 윤세주의 가묘에는 자음과 모음으로 풀어쓴 ‘조선민족영령’(원 표시·위 사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박광연 기자

중국 타이항산 스먼촌에 위치한 윤세주의 가묘에는 자음과 모음으로 풀어쓴 ‘조선민족영령’(원 표시·위 사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박광연 기자






‘ㅈㅗㅅㅓㄴㅁㅣㄴㅈㅗㄱㅕㅇㄴㅕㅇ’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불리는 타이항산(太行山) 자락의 한 시골마을 묘비. 가로로 자음·모음을 풀어쓴 한글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니 ‘조선민족영령’이란 글귀가 됐다. 묘비에는 ‘조선혁명열사 석정지묘’라는 한자도 있다. ‘조선혁명열사’이자 ‘조선민족영령’….


이곳은 독립운동가 석정 윤세주 열사(1901~1942년)가 묻혔던 곳이다. 1940년대 일본군과 최전선에서 맞서 싸우며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전신)의 영혼’으로 불린 윤세주. 경남 밀양이 고향인 그는 어떻게 이역만리 타이항산에서 ‘조선민족영령’으로 잠들게 됐을까. 


타이항산 일대에는 윤세주와 조선의용대의 역사가 지금도 살아 있다. 1941년 12월 일본군과 조선의용대 간 전투가 벌어졌던 허베이성(河北省) 스자좡시 위엔시현 후자좡 마을의 후궈첸(61)은 선친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조선의용대 분대장이 마을 입구에서 이불을 깔고 잤어요. 새벽에 일어나보니 산 위에서 일본군들이 쳐들어오자 조선의용대가 포위를 뚫고 마을 북쪽으로 갔다고 합니다.” 조선의용대원을 “오빠”라고 불렀다는 이도 생존해 있었다. 난좡촌에서 만난 왕치아오젠(90)은 “조선의용대원들은 굶주린 때가 많았지만 엄격히 규율을 지켰다”고 했다. 


타이항산의 중국인들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윤세주와 조선의용대. 그들은 누구인가.


윤세주는 3·1운동이 낳은 혁명가다.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의 곁에는 고향 선배이자 가장 가까운 동지인 약산 김원봉이 항상 있었다. 그들은 1919년 만주에서 의열단을 조직해 암살·파괴 활동을 전개했다. 1938년 중국 한커우에서 독립군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립했다. 무장투쟁이 독립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며 노선을 변경한 것이다. 당시 일제와의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이 타이항산이다. 윤세주는 1941년 다른 대원들과 함께 중국 팔로군사령부가 있는 그곳으로 갔다.


■ 중국은 기리고 우리는 모르는…‘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 


<1부> 우리는 독립운동가입니다 ④ 잊혀진 조선의용대를 찾아서




1. 중국 산시성 쭤취안현 윈터우디촌 입구에 조선의용대가 한글로 남긴 후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항일선전문구. 일본군으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에게 조선의용대를 찾아오라고 선전하는 내용이다. 2. 조선의용대가 1940년대 일제와 맞서 싸운 중국 내륙 타이항산의 기암절벽. 3. 중국 허베이성 찬황현 황베이핑촌에 있는 조선의용대원 박철동·손일봉·이정순·최철호의 묘. 4. 중국 허베이성 위엔시현 후자좡 마을에 있는 조선의용대가 머물렀던 가옥. 5. 한단시 진지루위열사능원 남쪽 구역에 있는 윤세주 열사 묘.사진 크게보기

1. 중국 산시성 쭤취안현 윈터우디촌 입구에 조선의용대가 한글로 남긴 후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항일선전문구. 일본군으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에게 조선의용대를 찾아오라고 선전하는 내용이다. 2. 조선의용대가 1940년대 일제와 맞서 싸운 중국 내륙 타이항산의 기암절벽. 3. 중국 허베이성 찬황현 황베이핑촌에 있는 조선의용대원 박철동·손일봉·이정순·최철호의 묘. 4. 중국 허베이성 위엔시현 후자좡 마을에 있는 조선의용대가 머물렀던 가옥. 5. 한단시 진지루위열사능원 남쪽 구역에 있는 윤세주 열사 묘.





타이항산은 남북 길이가 약 600㎞, 동서 길이는 약 250㎞에 이르는 거대한 산맥으로 산시성(山西省)과 허베이성의 경계를 이룬다. 사람이 깎아내린 듯한 정교한 형태의 높은 암벽이 이어지고 산세가 험준한 이곳은 일본군과 한·중 연합군의 최대 격전지였다. 


■ “항상 배고픔에 시달렸다” 




“조선의용대가 고생을 많이 했지. 항상 배고픔에 시달렸지만 농작물 하나 빼앗아 간 적 없었어.” 조선의용대를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 왕치아오젠(90).

“조선의용대가 고생을 많이 했지. 항상 배고픔에 시달렸지만 농작물 하나 빼앗아 간 적 없었어.” 조선의용대를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 왕치아오젠(90).





현지인들은 조선의용대를 또렷이 기억했다. 타이항산 자락 우즈산 마을에서 조선의용대원들과 함께 생활했다는 왕치아오젠 할머니(90)를 찾아갔다. 그는 마을에서 조선의용대를 기억하는 유일한 생존자로 알려져 있다. 지난달 19일 허베이성 한단시 서현 난좡촌의 아들 집에서 만난 그는 조선의용대와 얽힌 이야기를 생생하게 떠올렸다. “조선의용대가 너무도 고생을 많이 했지. 항상 배고픔에 시달렸어.” 조선의용대는 가난하고 배고팠다. 


“대원들이 우물에 있는 물을 끌어올릴 줄 몰라 하던 당시 기억이 생생해. 마른 장작을 패야 하는데 산에서 젖은 나무를 갖고 왔어. 고생을 안 해본 사람들도 있었지.” 침대에 앉아 있던 왕씨는 허리를 굽힌 채 일어나 우물물을 긷는 시늉을 해보였다. 실제 조선의용대원들은 지식인 출신이 다수였다.


할머니는 “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왔는지, 촌민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다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100~200명가량의 조선의용대원들은 전투가 없는 날에는 농사일에 주력했다. “촌민들은 평지에 콩을 심었는데, 대원들은 땅이 없어서 산에 심었지. 농사일을 잘 못했는데 가뜩이나 산에 심으니 잘 안됐어. 풍년이 든 적이 있었는데 대원들은 다 전쟁에 나가 수확한 작물을 보지 못하기도 했고.” 


극한의 조건에서도 조선의용대의 규율은 엄격했다고 한다. “대원들은 촌민들과 얘기를 나누지 못했어. 고위 관직에 있는 대원 한 사람이 대표로 나와 얘기했지. 촌민들의 농작물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전혀 없었어.” 


조선의용대 거주지 중 한 곳인 산시성 진중시 쭤취안현에 위치한 상우촌의 훙푸사를 찾아갔다. 기록에 따르면 1940년대 여섯 채가량의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당 한 채만 남아 있었다. 훙푸사에는 빛바랜 깃발만 나부낄 뿐 최근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없었다. 기둥에 붙어 있는 ‘조선의용군 전적지 옛터’라는 안내판이 이곳이 역사의 현장임을 나타낼 뿐이었다. 


■ “왜놈 죽이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라” 


조선의용대는 최전선에서 무장선전 활동을 주로 했다. 한국어·중국어뿐 아니라 일본어까지 구사할 수 있는 조선의용대원들은 선전구호를 활용한 심리전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중국 옌볜에서 발간된 조선의용대원들 증언집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이하 <대지우에서>)에는 선전활동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적의 또치까(진지)에서 약 50메터 떨어진 곳까지 들어가 먼저 1~2분간 징을 울려 왜놈들을 경황케 한 다음 류창한 일본말로 선전을 하였다…선전이 끝나면 전사들은 래일 다시 오겠다고 고시를 하고는 삐라를 안으로 던지고 돌아온다”(조선의용대원 장례신). 특히 윤세주는 “천재적인 연설가인 동시에 유능한 선동가”(조선의용대원 최채)였다. 


무장선전의 역사는 지금도 남아 있었다. 지난달 18일 방문한 쭤취안현 산간 오지의 윈터우디촌에는 입구에서부터 낯선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를 이루는 절문의 벽 정면과 양쪽에 흰색 페인트로 칠해진 한글 문구들은 조선의용대가 남긴 항일선전표어다. 


벽 정면의 ‘强制兵끌려나온동포들팔노군이있는곧마당조선의용군이있으니총을하랄노향하여쏘시요!’ 문구는 ‘일제에 의해 강제병으로 끌려 나온 동포들이여, 팔로군이 있는 곳마다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총을 하늘로 향해 쏘시오’라는 말이다. 오른쪽 벽면에는 ‘왜놈의上官놈들을쏴죽이고총을메고조선의용군을찾아오시요!’라고 써 있었다. 모두 강제징병돼 일본군으로 참전한 ‘조선사람’들의 탈영을 독려한 것이었다. 왼쪽 벽면에 적힌 ‘조선말을자유대로쓰도록요구하자’는 문구는 일본말을 강요하는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고취하려는 뜻으로 보였다.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윈터우디촌의 한글 선전문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다. 색이 바랠 때마다 문구를 다시 칠해온 촌민들의 노력 덕분이다. 2005년부터 윈터우디촌 촌장을 맡고 있는 자오지칭(59)은 선전문구를 보전해온 이유를 “고마움”이라고 표현했다. “조선 사람들이 조선의용대로 중국인들과 함께 항일전쟁을 했죠. 그 고마움에 촌민들이 아직까지도 의식적으로 한글 문구를 덧칠합니다.” 




1938년 10월10일 중국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 창립 당시 촬영한 기념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1938년 10월10일 중국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 창립 당시 촬영한 기념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 타이항산에 진 영혼들 


1941년 7월 타이항산에 온 조선의용대는 그해 12월 일본군과 최초로 교전했다. 후자좡 마을에서 여느 때처럼 선전활동을 하던 20여명의 대원들은 새벽에 잠든 사이 일본군 300여명의 습격을 받았다. <대지우에서>에는 당시 긴박했던 전투 상황이 묘사돼 있다. “벌써 놈들이 마을을 100여메터 사이 두고 물샐 틈 없이 사면포위를 하고 있었다. 적들의 탄알이 귀청을 찢으며 언덕우로 날아왔다.”(조선의용대원 장례신) 조선의용대원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쏘며 대응했지만 일본군의 압도적 화력을 당해내기 역부족이었다. 


지난달 20일 찾아간 후자좡 마을 곳곳에는 약 80년 전 전투의 역사가 남아 있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붉은 글씨로 ‘北…義勇街’가 적힌 표지판이 보였다. 마을에서는 북쪽길을 ‘조선의용대의 길’로 이름 지었다. 마을 북쪽은 조선의용대가 일본군 포위를 뚫고 이동한 방향이다.


마을 어귀에는 조선의용대원들이 지냈던 흙과 돌로 만들어진 중국 전통가옥도 있었다. 가옥 문 오른편 바닥에는 언뜻 보면 우물 같은 둥근 ‘구멍’이 보인다. 4~5m 깊이 구멍 바닥에 다다르면 옆쪽에 한 사람이 웅크릴 수 있는 공간이 파여 있다. 마을주민 후궈첸은 “일본군 침입에 대비해 만든 피란처였다”고 했다. 집 내부에는 조선의용대원들이 사용한 나무의자와 붉은 옷궤짝, 받침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후자좡 전투에서 20대의 조선의용대원 박철동·손일봉·이정순·최철호가 전사했다. 촌민들은 전투를 피해 이들의 시신을 약 50㎞ 떨어진 허베이성 찬황현 황베이핑촌에 옮겨 묻었다. ‘4인 열사의 묘’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조성돼 있다. 비석에는 각자의 독립운동 행적이 새겨져 있는데, 손일봉은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 폭탄 투척 의거를 도왔다고 적혀 있었다.


1942년 5월 일본군과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3만여명의 병력으로 팔로군의 타이항산 근거지에 대한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중국 항일영웅인 팔로군 부총참모장 쭤취안(左權) 장군이 전사했고, 정치위원이던 덩샤오핑(鄧小平), 총사령 주더(朱德) 등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최선두에서 목숨을 걸고 일본군 포위를 뚫어냈다. 그 과정에서 여성 등 비전투요원 40여명을 이끌던 조선의용대 지도자 윤세주·진광화가 전사했다. 다리에 총탄을 맞 고 움집에서 며칠간 버틴 윤세주는 일본군 총성이 다시 울리자 조선의용대원 최채·하진동에게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함께 있다간 다 죽을 수도 있소. 승리의 그날을 위해 우리는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아야 하오. 지금부터 우리 셋은 갈라져 있어야 하오.” 


■ 중국이 기억하는 ‘열사’ 윤세주 


3·1운동 뒤 무장투쟁 나선 윤세주 
“천재적 연설가이자 선동가” 불려
중 타이항산서 항일 투쟁하다 전사
 


윤세주·진광화는 1942년 10월 허베이성 서현 스먼촌 타이항산 자락에 쭤취안 장군과 나란히 묻혔다. 중공 중앙 북방국과 팔로군 총부 등의 주관 아래 안장식이 거행됐다. 주더는 “자유를 위해 희생된 전사들의 생명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19일 스먼촌에 있는 윤세주·진광화의 묘지를 찾아갔다. 뒷배경에 웅장한 타이항산 암벽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사방으로 탁 트여 ‘명당’으로 꼽힐 만한 곳이었다. 현지에서 묘를 관리하는 주민 리시우잉(54)을 만날 수 있었다. 1940년대 타이항산에서 항일전을 지켜봤던 리시우잉의 시아버지가 관리를 시작했고, 남편을 거쳐 2014년부터 그가 맡고 있다. “시아버지의 부모님이 일본군의 칼에 찔려 돌아가셨어요. 쭤취안 장군과 윤세주·진광화가 이곳에 묻힐 때 시아버지는 나이가 굉장히 어렸대요. 그때 항일투사들 정신에 감동받아 관리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거죠.”


한글 선전 문구 적힌 윈터우디촌 
가옥과 은신처 있던 후자좡 마을
스먼촌엔 윤세주 등 의용대 묘… 
이곳 주민들이 지금까지 보존


리시우잉은 새벽녘에 밭일을 마친 뒤 묘 주위를 정돈한다고 했다. 최근에는 방문객이 많아져 매일 오다시피 한다. “톈진, 상하이 등 전국 각지에 있는 당 간부들이 애국교육을 받기 위해 요즘 이곳을 많이 찾아와요.” 이날도 중국인 10명이 묘지를 방문했다. 그중 리루이쥔(41)은 “조선과 중국, 동남아 사람들이 한가족이 돼 항일전쟁을 했기에 참배한다”고 말했다. 스먼촌의 윤세주·진광화 묘는 ‘가묘’다. 1950년 10월 중국 당국은 유해를 한단시 진지루위 열사능원으로 옮겼다.


1940년대 중국 관내 정규전 벌인 
유일한 독립단체 ‘조선의용대’
조국 위해 싸우다 타국 묻혔지만 
여전히 이들의 삶 주목받지 못해


조선의용대는 1940년대 중국 관내에서 일본군과 유일하게 정규전을 벌인 독립운동단체이다. 일제의 침략성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40년대 최전선에서 목숨을 내놓고 총을 든 조선의용대의 용기와 희생은 독립운동의 표상이다. 당시 중국 국민당은 내부 문서에서 윤세주를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고 칭했다. 그의 동지였던 김원봉은 1943년 윤세주의 죽음을 이렇게 슬퍼했다. “내심으로부터 나오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 분투하고 있는 화북 동지들은 가장 우수한 영도인물을 상실하였고, 전 조선혁명 진선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3·1운동에서 시작해 타이항산 전사로 일생을 바친 그와 조선의용대원들의 독립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윤세주의 영혼은 여전히 이역만리 타이항산을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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