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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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독립정신 」답사단 레포트 관련 자료입니다.
글쓴이 관리자
날 짜
07-05-23 17:47
조회(6126)
독립정신 답사단 레포트는 A4지 기준으로 2매내외로 작성하셔야 합니다.
레포트와 신청소감은 답사단원 선발에 실질적인 기준이 될 것입니다.
답사단원들께 이번 답사지역에 대해 이해를 돕고자 만주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관련 주요사건만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본회에서 제시한 독립운동 관련사건 이외에 다른 독립운동관련 레포트를 제출하셔도 무방합니다.
-이륭양행의 경우 답사단원들께서 자료를 쉽게 접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어 본회 독립정신 회보(2005년 8월, 제8호)에 실렸던 김학민이사의 글을 후면에 발췌하여 실었습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1.안중근 의거
1919년 10월 26일, 조선 침략의 수괴 이토 히로부미가 코코프체프 러시아 재무대신회담과 만주침략을 시찰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뒤 안중근의사 등이 사흘 동안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운 뒤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두에서 사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중국내 대한민국독립에 대한 필요성을 중국인이 인식하고 지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이 사건으로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를 양분하려는 계획이 무산되었다.

2.청산리 대첩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2500여명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백운평 등지에서 5만 일본 정규군을 물리친 전투이다. 이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전과를 낸 사건이며 ‘일군무적신화’를 깨고, 만주지역 항일투쟁세력의 투지를 고무시킨 전투이다. 청산리 전투 등 만주지역의 무장독립군의 활동은 일본의 만주진출을 수년간 지체시켰다.

3.신흥무관학교
우당 4형제가 전재산(현시가600억원, 이완용이 친일로써 얻은 자금과 비슷한 수준)을 기부해 만든 신흥강습소를 이어받은 신흥무관학교는 한족회(韓族會) 산하의 학교로써 폐교될 때까지 2,1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했다. 지청천, 이범석 등의 유수한 무관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담당했으며, 만주지역 독립군의 대다수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이들은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에서 항일무장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일부는 광복군으로 이어져 해방 전까지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4.독립운동과 함께한 민족문학
우리민족의 발상지이자, 민족적 대서사시의 현장인 만주지역에 우리민족이 다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우리 민족은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서 일어난 애국문화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아 용정(龍井)을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부흥시키고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곳에서 윤동주, 송몽규, 강경애, 김약연 등의 많은 문학가들이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문학을 통해 민족의 독립과 개화 의식과 의지를 열정적으로 표현해 그 당시의 문화계몽운동과 반일투쟁에 기여하며 민족 독립운동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5.이륭양행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과 연락처로 위장된 사업체로 영국 출신 아일랜드계 죠지 쇼(G.L Shaw)가 운영했다. 영국에게 조국인 아일랜드를 빼앗긴 죠지 쇼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아일랜드와 유사함을 느끼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6. 기타 만주지역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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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은인, 조지 쇼오 찾기

임시정부 안동현 비밀연락거점

1919년 3․1운동 직후 백범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의 원대한 꿈을 품고 조국을 탈출, 15명의 동지들과 함께 상해로 망명한다. 이때의 김구 일행의 상해 탈출은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그려져 있다.

  “... 나는 중국인의 인력거를 불러 타고 바로 큰 다리 위를 지나서 안동현의 어떤 여관에서 변성명하고 좁쌀장수라 표방하고, 7일을 경과하여 이륭양행 배를 타고 상해로 출발하였다. 황해안을 경과할 시에 일본 경비선이 나팔을 불고 따라오며 정선을 요구하나 영국인 함장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전속력으로 경비구역을 지나 4일 후에 무사히 상해 황포강 나루에 닻을 내렸다. 배에 함께 탄 동지는 도합 15명이었다.”

  일본 경비선의 정지 명령을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배를 몰아 김구 선생을 무사히 상해로 탈출시켰던 ‘영국인 함장’은 바로 1920년 전후 우리 독립운동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던 아일랜드인 조지 L. 쇼오이다.
  영국계 태고선박회사의 안동현 대리점 이륭양행을 경영하고 있던 그는, 1919년 5월 상해 임시정부가 국내와의 연락기관으로 교통국을 설립하자, 자진하여 이륭양행 2층에 교통국 안동현사무소를 설치토록 하였다.
  이후 국내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쇼오의 도움으로 상해로 탈출할 수 있었으며, 독립운동자금을 구하러 중국에서 국내로 잠입하는 독립운동가들도 무사히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은 김구 선생이 ‘한국의 잔다르크’라 불렀던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도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시아버님(1919년 상해로 망명한 구한국 농무대신 동농 김가진 선생을 말함) 일행은 무사히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에이레 출신의 쇼오라는 사업가가 있었다. 에이레도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오래도록 싸워온 나라이므로 자연 우리 민족운동에 깊은 동정을 가졌고, 쇼오는 여러모로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쇼오는 이륭양행이란 회사를 경영했는데, 영국계 태고선박공사의 안동현 대리점을 맡고 있었다. 시아버님 일행은 이륭양행이 대리하는 계림호편으로 10월 말 상해에 도착했다.”

또 쇼오는 의열단의 대일 테러활동에도 적극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는 이에 대한 김산의 진술이 들어 있다.

  “의열단은 여덟 개의 전략적 건축물을 파괴하고 모든 대도시에 있는 일본인 관헌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들은 비밀리에 2백개의 폭탄을 한국에 들여왔다.
  폭탄은 안동에 있는 영국회사 앞으로 보내는 의류품 화물상자에 넣어 이 회사 소유의 기선에 실어 상해에서 보냈다. 안동회사의 지배인은 아일랜드인 테러리스트였는데, 우리 한국인들은 그를 “샤오”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인을 거의 영국인만큼이나 싫어하였다. 그래서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원해 주었다. 샤오 자신이 상해로 가서 ‘죽음의 화물’ 선적을 감독하였다. 그는 돈은 한푼도 받지 않고 오로지 동정심에서 스스로 한국을 도와 주었다. 한국인 테러리스트들은 몇 년 동안 그의 배로 돌아다녔으며, 위험할 때는 안동에 있는 그의 집에 숨었다...
(안동 거점이 무너진 후) 샤오가 나머지 테러리스트들을 자기의 배에 태워 천진과 상해로 탈출하도록 도와 주었고, 그 직후 곧바로 샤오는 일본측에 체포되었고, 또한 자기 직업을 잃어버렸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그는 상해로 갔으며, 임시정부는 대규모 대중집회를 열어 그를 환영하였다. ‘샤오’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이런 희생을 한 것이 자랑스럽고 기쁘다고 말했다.
  그가 갇혀 있을 때 그의 부인이 아일랜드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는 곧 멀리 떠나갔다. 나는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어디에선가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일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한국인이 이 아일랜드인을 사랑하였으며, 그는 지금 우리 혁명운동에 있어서 전설적인 인물로 되어 있다.”

조지 쇼오의 체포

『아리랑』에서의 김산의 진술대로, 일제는 1920년 7월 11일 신의주에서 쇼오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1922년 6월 조선총독부 경부국 발행 「조선치안상황(국외)」의 ‘영국인 쇼우 사건’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어, 일제의 조지 쇼오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성질이 남과 잘 어울리지 않고, 또 이기심이 커서 취리를 위해서는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가장 열등한 인격의 소유자이다. 더욱이 평소에 치열한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어 일본인을 마치 사갈(蛇蝎)처럼 싫어하고, 항상 감정이 격해 있어 평정을 잃는 경향이 있다. 특히 본인은 아일랜드인인 관계로 조선의 현황에 동정하는 한편, 자기의 이욕심(利慾心)을 만족시키기 위해 구한국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불령선인을 이용하여 이기를 얻으려 꾀하였다.
  그는 자기의 현주지에 대한 일본제국의 법권이 미치지 못함을 기화로 하여 대한 임시정부․대한청년단연합회 및 기타 단체의 불령선인들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대정 8년 7월 경부터 이듬해 대정 9년 7월 상순까지 개요 다음과 같은 언동을 감행하였다.

1. 자기 소유의 거택․점포․창고의 일부를 불령선인에게 대여하여 독립운동에 편의를 주었다. 불령선인들은 이 집에 안동교통사무국을 설치하여 쇼우의 비호 아래 제1차 국장 선우혁, 제2차 국장 홍성익, 제3차 국장 양준명, 제4차 국장 장덕로 등이 잇따라 취임하여 상해임시정부와 한국 내지와의 연락․교통에 종사하고 불온문서 및 위험물 수송을 맡아 했던 것이다.

2. 자기 관리에 속하는 선박을 공급하여 불령선인의 상해․안동간의 왕복 및 무기․탄약․불온문서 등의 운반을 방조하였다. 즉, 이륭양행 소유 기선 계림호는 상해임시정부 비서국장 겸 주계국장 고일청 외 수명의 불령선인이 승선하고 있었는데, 쇼우는 육상에 있어서의 일본 관헌의 경계가 엄중함을 알고 고일청 일행의 상륙의 위험함을 느껴 교묘히 그의 상륙을 저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관헌에 대하여 불령선인이 배에 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하류 대동구 앞바다에서 일부를 상륙시키는 등, 극력 불령배를 비호함으로써 체포를 면하게 한 사례가 있다.

3. 대정(大正) 8년 8월 자기 주택 또는 점포의 일부에 잠복한 상해임시정부 재무원 주현칙이 군자금으로서 한국내에서 모은 돈을 상해로 보내는데 있어, 자기가 미리 상해 회풍은행과 거래가 있음을 기화로 액면 1천 218원 75전의 수표를 발행하여 편의를 주어 송금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였다.

4. 대정 9년 2월 23일, 자기 점포의 일부에 잠복한 상해임시정부 안동교통사무국장 홍성익이 안동 신시가에서 일본 경찰 관헌에게 체포되자, 쇼우는 스스로 그 전말을 상해 임시정부에 타전하고, 후임자를 급속히 파견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 결과 후계자로 양준명이 급거 내착할 때까지 대한청년연합 편집부장 성석련을 자택에 잠복시켰다.

  위는 다만 그 일례를 든데 불과하지만, 이처럼 모든 수단방법을 써서 불령선인을 비호하고 그들의 운동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봉천에 있는 영국 영사는 그 무모함을 충고하였으나, 그는 완고히 이를 듣지 않고 더욱 더 횡포를 더하였다.

  1920년 8월 6일 경성고등법원 검사장은 쇼오 사건의 연루자 24명과 함께 쇼오를 내란 피고사건으로 기소하였다.(일본 외무성 자료)”

  쇼오를 둘러싼 영․일의 갈등

  그러나 일제의 쇼오에 대한 기소는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영국의 항의로 외교마찰을 초래했다. 영․일정부는 쇼오 문제로 수개월간 지루한 협상을 했으며, 결국 그 해 11월 4일 쇼오를 보석으로 석방하기로 합의했다. 다음은 이 사건에 대한 일본 외무성 자료의 한 부분이다.

  “주로 영․일동맹의 우의를 중하게 여기는 견지에서 본건을 사실상 해결하고자 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에 대해서는 전술의 이유에 비춰 쇼우에 대해 보석을 허가해 줄 바를 지적하여 그 의견을 물었는 바, 동부에서도 정부의 입장을 이해하여 피고인 쇼우로부터 보석 청구가 있을 때는 조선총독부는 검사에게 보석허가의 의견을 내겠다는 것을 승낙하였다. 단 보석을 허가하든지 안하든지의 결정은 물론 재판소의 전권에 속하는 바로,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는 회답이 있었다.
  11월 2일에 이르러 영국대사는 본국정부의 조령에 기초하여 보석에는 반대하고 무조건 석방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제국정부는 그 입법근본주의상 및 사법권의 독립유지상 그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회답을 보냈다. 그로부터 먼저 쇼우는 증거 취조상의 사고를 일으켰고, 장기수감에 의해 신체가 쇠약해졌다는 것을 이유로 재삼 보석을 요구해 11월 4일 경성고등법원 예심판사는 법률에 근거하여 보석금 1,500원을 내도록 하고 보석을 허가해 석방하였다.”

  쇼오는 석방된 후 안동으로 돌아와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으며, 1921년 1월 26일에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및 안창호 등이 베푼 환영연에 참여하고, 이후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어울리며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경찰의 정보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조선치안상황」)

  “쇼오가 대정 10년 1월 상해로 도항하였을 때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대소 2개의 금색 공로장을 받았다고 하며, 동년 11월 경에는 그 작은 것을 가슴에 달고, 조선 독립은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하며 득의만면한 바 있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사건에도 관여했었다고 하는데, 기록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다.

  2001년 조지 쇼오 찾기

  나는 1999년 가을 조지 쇼오를 소재로 한 장편(이 책은 「슬픈 아일랜드」라는 제목으로 2000년 8월에 출간되었다)을 구상하고 있던 소설가 윤정모씨의 부탁으로 이 인물의 행적을 추적하게 되었다. 윤정모씨는 『백범일지』와 『장강일기』에 붙인 쇼오에 대한 나의 주석을 읽고, 내가 이 전설적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나, 나는 그 주석 이상은 알지 못했다.
  이후 어렵사리 ‘불온인물 조지 쇼오’에 대한 일제 경찰의 자료들을 구해 볼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1920년 이후 그의 행적 및 후손들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일본 경찰 자료에 의하면, 그는 일본인 부인과 사이에 아이를 둘 두었다)
  로이드보험사사(社史)를 통해 쇼오가 운영했던 이륭양행의 본사인 태고선박회사가 1832년 홍콩에서 설립된 자르딘 매터슨(Jardine Matheson)사였음을 알아냈고, 이 회사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음을 인터넷으로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이 회사에 이륭양행 및 안동과 상해 사이를 운항하였던 계림호, 쇼오에 대한 자료를 보내 달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
  6월에는 어렵게 떠난 유럽 여행길에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아일랜드에서 수소문 끝에 더블린 대학에서 운영하는 ‘아일랜드인 가계찾기 서비스’(IGRS)가 있음을 확인하고, 조지 쇼오의 가족이나 후손을 찾아달라고 신청하려 했으나, 주머니 가벼운 배낭여행객으로서는 377달러의 수수료가 부담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어 지금껏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중에 윤정모씨로부터 쇼모의 6촌 정도 되는 친척 한 사람이 런던에 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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