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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009년 9,10월호> 다시 생각하는 우익(右翼)
글쓴이 관리자
날 짜
09-09-09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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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하는 우익(右翼)

한 나라의 대통령이 ‘중도실용’을 표방하고 나섰다. 이미 흔하게 유통되는 개념이라 새삼스러울 리도 없지만, 한편으로 좌익·우익에 진보·보수다 말이 많은 오늘날, 그 개념들이 올바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따져보는 것은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대한민국 우익의 뿌리는 명료하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친일파들은 기타 친미주의자들과 함께 미군정청과 밀착함으로써 여전히 사회지배층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미군정 아래 진행된 적산불하와 원조경제를 통해 경제적 기반을 확충한 이들은 민족주의 세력 등을 배제한 배타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북측에서 진행된 친일파 척결과 재산환수에 존립근거를 위협받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미군정의 반공주의에 편승하여 광기어린 반공의 선봉에 섰다. 그리하여 이들은 마침내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고 백범을 암살함으로써 우익 파시즘의 무소불위 권력을 창출해낸다. 이후 군사독재정권은 그 연장선으로서, 재벌 위주의 성장주의 경제체제는 이들의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이들은 태생적 한계로 말미암아 물리력을 동반한 반공주의를 떠나서는 존립할 수가 없었다. 이들이 들이대는 이념의 잣대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이 ‘좌익’이었으며 자신들의 존립에 위험한 사상은 모두 ‘좌’였다. 좌는 우의 상대적 개념이 아닌, 우의 기준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대상이었다.

태생과 성장이 그럴진대 대한민국의 우익이 스스로를 우익이라고 대놓고 떠들지 못하는 것도 매우 당연하다. 고심 끝에 시장자유주의에 입각한 ‘합리적 우익’이라는 그럴듯한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이는 곧 과거 우익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인 탓에 큰 세력을 형성하기에는 무리였다. 이렇듯 신자유주의마저 동력화할 수 없었던 이 땅의 많은 우익들은 ‘중도’라는, 이전과는 다른 영역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하나의 선분에 대척점을 이룬 좌와 우를 전제로 중간지대를 규정하고, 탈이념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노출된 개인들을 모두 중도라고 단정해버린다. 더불어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앞세운 계층적 접근으로 계급적 단층을 희석함으로써 허위의식에 싸인 자칭 중산층마저 자신의 세력 범주에 포함시켜버린다. 이렇게 비대해진 ‘중도’는 이념 선분까지 외면하며 중도야말로 ‘제3의 길’이라 우기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중도’라는 개념 자체가 ‘이념의 선분’이라는 형식논리의 틀이 부정되는 순간 존재의미를 잃는다.

우익의 철학 근저에는 절대정신이나 자유경쟁의 장(場)인 시장 등 절대불변의 가치가 존재하고 그 결과로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유기체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이 불변의 가치를 위협하는 어떠한 사회적 갈등도 유기체를 해치는 암적 존재라는 사고가 깔려 있다. 반면에 좌익의 철학 근저에는 절대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가치는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존재 형태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고, 이 가치의 충돌이 사회와 역사의 발전 동력이라는 사고가 깔려 있다. 우익과 좌익, 보수와 진보의 갈림이 명확한 이 대목에서 중도가 가당할까? 시장주의와 반(反)시장주의, 사회통합을 해치는 분열과 사회발전의 동력으로서의 대립 등의 인식 차이의 중간지대는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좌우 날개로 나는 새’의 비유에서조차 중도론자들은 역사와 사회의 발전이라는 본질적 측면을 뒤엎어 가운데 몸통인 알맹이가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기는 기지를 발휘한다.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는 개념의 한계로 ‘중도’에 ‘실용’이 붙고 이 ‘실용’의 합리화에는 그 유명한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 뒤따른다. 쥐를 잡는 고양이의 본질적 측면에서 보면 털의 색깔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나 쥐를 잘 잡으면 그만이다’고 하면 의미가 달라진다. ‘실용’이라는 말 자체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라는 물음에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실용’에 조선시대 ‘실학’ 사상까지 끌어 붙인다. 실학은 ‘이(理)’라는 절대원리에 의거하여 고착된 질서를 합리화하는 성리학에 반해 백성들의 실체에 귀착하자는 반(反)사대부 성격의 학문이었다. 이처럼 피지배 계층의 이해와 요구에 근거한 사상을 몰이념적 중도에 끌어 붙이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거나 아니면 작위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중도란 특정 이념을 특정 목적에 맞게 탈색해서 보여주기 위한 미사(美辭)일 뿐이다. 대의를 위장해 지배계층의 이해를 관철시키기에는 더없이 좋은 개념이다.
현실에서는 좌우라 규정하기 힘든, 제한된 개인의 경험과 단편적 사고체계에서 비롯된 사상적 경향성에 머문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사회의 변화를 원하는 이가 성장논리에 묶여 재벌체제를 용인하는 이중성을 보이는 예 따위는 수도 없이 많다. 중도를 표방하는 우익은 이 다수를 대상으로 굳이 좌우익의 선분을 들이대면서 ‘중도 좌’니 ‘중도 우’니 해대다가 무책임하게 선분의 가운데로 몰아넣고 선분이 갖는 한계를 탓하며 x축에 직각으로 y축 하나를 보태보기도 한다.

이상에서처럼 형식논리에 입각한 ‘이념 선분’은 우익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이 틀을 이용해 우익이 ‘민족주의는 우이므로, 김구는 우익이다’라거나, 또는 ‘김구는 좌도 우도 아닌 진정한 중도였다’라고 선전한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길을 가도 오른쪽으로는 안 간다’는 인사들이 백범을 오른쪽으로 몰아가 우익의 태생적 한계에 명분을 실어주는 일은 어떻게 이해할까. 역사적 해석을 떠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과 그분을 존경하고 본받고자 하는 이 땅의 많은 이들을 우익의 편으로 밀어 넣는 것은 우익이 쳐놓은 형식논리의 덫에 걸리는 길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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