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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010년 1.2월> 국치 백년을 맞이한 우리의 결의
글쓴이 관리자
날 짜
10-03-0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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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국치 백년을 맞이한 우리의 결의

 금년은 ‘경술국치’라고 불리는 일제의 한국병탄(倂呑) 1백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이 개시된 직후 한국정부가 1월23일 국외중립선언을 공포했음에도 불구하고 2월 초 인천에 군대를 상륙하여 서울까지 강점했다. 그 후 04년 2월 말의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했다. 이 ‘의정서’에 따라서 한국에 이미 진주한 일본군의 활동을 합법화 시키고 우리국토를 제멋대로 징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나아가 8월 22일에는 ‘한일협정서’또는 ‘제1차 한일협약’이라고도 불리우는 ‘한일외국인고문용빈(傭聘)에 관한 협정서’를 체결하여 일본인과 일본이 추천하는 사람을 한국정부의 재정·외교 등 주요부문의 고문으로 채용하도록 했다. 이렇게 일본은 사실상 한국의 상당부분을 지배를 확립한 후 러일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한국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시켰다.
 11월 17일 한국정부의 각료들을 일본공사관으로 불러들여 보호조약의 승인을 강요했다. 일본군의 무력시위를 통한 압박을 받으며 진행된 이 회의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법무부대신 이하영은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고종이 불찬한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이 나지 못하자 헌병사령관까지 대동하고 들어온 이토는 각 대신을 일일이 만나 찬부를 물어 대신 5명의 찬성을 받아냈다. 이들은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세순 및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5인으로 을사5적으로 남게 된다. 이 조약의 공식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으로도 불렀다.
이 조약을 체결하는데 있어 고종은 끝내 서명을 거절했으며 국새도 왜놈들이 강탈하여 찍은 것으로 절차상 완전히 불법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을 ‘을사늑약(勒約)’, 즉 ‘억지조약’으로도 불린다.
을사늑약에 앞서 05년 4월 1일에는 한일통신협정이 체결되어 한국의 모든 통신사업과 기존시설전부를 강탈해 갔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을사조약의 실황을 외국에 전신으로 알리고 ‘국제정의’에 호소할 길마저 막혀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영국은 일본과의 동맹국이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미국은 일본의 전비 80%까지를 차관해주며 미국무기로 일본군을 무장시켜 동맹국이상으로 일본을 지원했다. 그리고 포츠머츠강화조약을 알선하면서 조약체결 약 1개월여 전인05년 7월 29일 일본 도쿄에서 가쓰라 다로 일본 수상과 W.H.테프트 미 육군장관 사이에 ‘가쓰라-테프트밀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일본 보호국화를 사전 약속한 바 있다.
이 밀약은 당시 우리의 국가운명과 직결되는 것으로 여기에 참고로 올린다.

1) 미국과 같은 친일적인 나라가 필리핀을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대하여 유 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전혀 침략적 의도를 갖지 않는다.
2) 극동의 평화유지는 일본·미국·영국 정부의 상호 양해를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 동시에 유일한 수단이다.
3)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 결이며 극동의 평화에 직접적으로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

바로 이 밀약에 뒤이어 영·일 제2차 동맹이 체결된다. 이렇게 3국은 일본의 한국침략과 미국의 필리핀 점령 추인 문제의 야합이 성립된 것이다.
을사늑약이후 미국은 주한공사관을 폐쇄하고 영사관으로 대처하는데 앞장섰다.
1951년 이후 한·일 양국은 이른바 ‘국교정상화’를 위하여 여러 차례의 회담이 있었는데 미국은 일본의 반성 없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회담이 성공되도록 재촉해왔다. 결국 이러한 미국의 뜻에 부응하여 1965년에 굴욕적인 ‘한일기본조약’이 맺어진 것이다. 한·일관계의 진정한 정상화는 ‘을사늑약’등 불법적으로 맺은 조약으로부터 출발하여 ‘경술합병’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조약이 불법이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시인하는데서 출발해야한다. ‘기본조약’이 맺어졌으니 모든 것은 끝났다는 주장하는 한 두나라의 관계는 결코 ‘정상화’될 수가 없다는 것이 민족의식을 갖고 있는 모든 식자의 소신인 것이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세계에 호소하고자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선생 등을 특사로 보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07년 7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그 달 말 ‘정미 7조약’혹은 제3차 한일협약이라고도 불리는 ‘한일신협약’을 이완용 내각에 제출하여 이제 완전히 힘을 잃은 순종의 재가를 받아 한국의 식민지화를 한층 발전시켰다.
을사늑약 직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항거가 정미신협약에 대한 항거로 더욱 기세를 올려 전국 각지에서 전개됐다. 적어도 50만 명이 의병항쟁에 참여했으며 15만 이상이 전투와 학살로 희생됐다. 1910년 초에 이르러 의병의 항쟁은 거의 진압되어 결국 그 해 8월에는 일본의 데라부치 통감과 역적 이완용 총리 사이에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된 것이다.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국민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새로 다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하고는 올바른 ‘역사의 청산’을 통하여만 새로운 우방이 될 수 있다는 결의를 명백히 밝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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