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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012년 11월, 12월> 다시 '다카키 마사오'를 생각하며 (김삼웅)
글쓴이 관리자
날 짜
12-11-0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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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前 독립기념관장)

 나는 지난 7월 하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중국 화북지역 조선의용대의 전적지를 답사하는 「제8기 독립정신 답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산제비도 날기 어렵다는 태항산 기슭에 묻힌 윤세주ㆍ진광화 열사의 묘소에 맑은 술을 따르면서 “당신들은 바보!”라고, 통한의 눈물을 삼켰다.
 이분들은 1942년 5월 태항산에서 일본 관동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이국의 산중에 묻혔다. 다행히 중국 정부가 묘소를 잘 조성하여 보존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젊디젊은 청춘에 나라를 되찾겠다고 수륙 수만리, 중국에서도 험하기로 이름난 태항산에서 일본 관동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이들을 나는 왜 ‘바보’라고 했는가.
 당신들도 광복군이나 의용대가 아닌 일본군에 지원했으면, 해방 뒤 장군이 되고 군 수뇌부가 되고 혹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왜 멍청하게 중국으로 망명하여 생고생을 하고 죽어서까지 이역 하늘 아래 묻혔는가. 나는 돌아서는 버스에서 내내 이런 생각에 차창으로 펼쳐지는 태항산의 장엄한 풍광이 자꾸 헷갈렸다. 그리고 ‘다카키 마사오’를 비롯하여 만주군, 일본군 출신으로 해방 조국에서 승승장구하고 대를 이어 부귀광영을 누리는 ‘천황의 적자’들을 생각했다.
 다카키 마사오  - 우리에게 낯선 이름, 본명  박정희 - 우리에게 너무 낯익은 이름이다.  윤세주ㆍ진광화 열사 등이 중국 팔로군과 함께 일본 관동군에 맞서 싸울 때 박정희ㆍ백선엽 등은 관동군 소속의 ‘충용스러운’ 일본군이었다. 이들은 팔로군과 교전하는 등 일본을 위해 한국 청년들이 다수 참여한 팔로군의 소탕전을 벌였다.
 다카기 마사오는 유별났다. 문경공립보통학교 훈도(교사)로 근무하던 중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세운 만주국 군관학교에 지원한다. 하지만 기혼인데다 16세 이상 19세의 연령 제한에 걸려 수용되지 않았다. 당시 그는 23살이었다.
 다카키는〈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박정희〉라는 혈서와 함께 일제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절절한 편지를 썼다. “일본인으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이 때의 ‘조국’은 일본이었다.
 다카키는 일본군 장교들을 감동시켜 마침내 입학이 허가되고,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교하여 2년 뒤 졸업할 때는 우등생으로 선정되어 만주국 황제의 금장 시계를 받았다. 예과 졸업 뒤 일본군 제6관구 예하 제5단에 파견되어 2개월 동안 부대실습을 거쳐 성적 우수자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되었다. 2년 뒤 일본육사 제157기로 졸업. 견습사관으로 소만 국경지대의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돼 잠시 근무한 뒤 만주국군 제6관구 소속 보병 제8단으로 옮겨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다카키가 소속된 부대는 1944년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을 공격하고 그는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다카키는 1944년 12월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어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에 대한 작전을 수행했다. 이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열하성 등에서 팔로군과 교전에 참가하고, 1945년 7월 중위로 진급했다.
 해방 뒤 북경으로 가서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 제2중대장이 되었다. 1946년 4월 부대가 해산되자 천진을 거쳐 미국 수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귀국했다.
 일제에 충성을 다짐하면서 혈서로 지원한 다카키는 한국 청년들이 다수 들어간 팔로군 섬멸 작전에 공을 세우고, 일제가 패망하자 재빨리 광복군이 되는 변신을 보였다. 그리고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가 육군 장교가 되고, 대구 10월사건을 전후하여 남로당의 군 내부 조직원으로 가담했다. 여순사건이 발발하고 남로당 군내부의 프락치 혐의로 체포된 박정희는 좌익 혐의를 시인하면서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제공하고, 일군 출신들의 구명운동으로 군재의 무기징역에 이어 재심에서 15년으로 감형을 받고 파면되었다. 6ㆍ25전쟁 중 현역에 복귀하여 이승만 정부 시절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실패하고, 1961년 다시 5ㆍ16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타도했다.
 박정희는 폭압의 통치자였다. 약 19년 동안의 통치기간 대부분이 계엄령, 위수령, 휴교령, 비상대권, 긴급조치 등 폭압으로 일관하였다. 왕조시대의 용어로 폭군이다.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부통치를 시작하여 이듬해 12월까지 계엄통치를 자행했다. 64년 6월 한일굴욕회담을 반대하는 국민을 향해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65년 가을에는 연ㆍ고대에 무장군인을 난입시켜 시위학생들을 짓밟고,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내렸다. 위수령과 함께 서울의 10개 대학에 무장군인을 진주시켰다.
 71년 12월 느닷없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대통령 비상대권을 장악한 다음 72년 10월 유신쿠데타를 감행, 전국에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박정희의 폭압통치는 멈출 줄을 몰랐다. 대학가에 유신반대의 시위가 일게 되자 74년 1월 긴급조치 1호의 선포에 이어 4월 3일에는 4호를 선포했다. 유신헌법을 비판ㆍ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비상군법회의를 통해 사형ㆍ무기를 남발했다. 긴급조치는 비상계엄보다 더 가혹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 4호의 약발이 떨어지는 듯하자 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한층 강화된 무력통치를 감행하고, 이 해 10월 18일에는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 인근의 마산ㆍ창원에는 위수령을 선포했다. 그의 재임 기간 절반 이상이 비정상의 무력통치였다. 2차례의 쿠데타와 4차례의 비상계엄령, 2차례의 위수령, 3차례의 휴교령, 6년 동안 긴급조치를 통해 정권을 유지했다. 민주헌정을 짓밟고 자신이 만든 헌법도 폐기하고, 초헌법적 비상대권을 장악하고, ‘긴급’을 일상화하는 1인 전제의 독재권을 휘둘렀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처형, 인혁당 8인 처형, 김대중 납치, 장준하 타살 등 수많은 인명살상과 탄압이 그의 재임 중에 저질러졌다. 흔히 박정희는 독재정치를 했으나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 60~70년대는 한국ㆍ일본ㆍ대만ㆍ싱가포르ㆍ스페인ㆍ이탈리아 등이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값싼 유가,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과 지원이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경우, 한글세대의 탄생으로 양질의 산업예비군, 한일굴욕회담으로 받은 유무상 5억달러, 한국군 5천명 희생의 대가인 10억 달러 규모의 베트남 파병 효과 그리고 저곡가, 저임금 등 농민과 노동자 착취, 지역, 산업, 노동차별을 통한 경제 성장이었다. 그 결과 부정부패, 부익부 빈익빈, 농어촌황폐, 99 대 1의 양극화현상을 초래했다. 박정희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 사회정의, 민족정기, 지역평준화가 파괴되었다. 야만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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