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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014년 9월, 10월> 잊지 않겠습니다(문학진)
글쓴이 관리자
날 짜
14-09-22 12:15
조회(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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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진
前국회의원

Ⅰ.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가슴 절절한 이 편지는 안중근의사(1879~1910)에게 보낸 안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의 ‘마지막 편지’이다.
 의병 참모중장이던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에게 권총 3발을 쏘아 절명케 하고 꼭 5달 뒤인 1910년 3월26일 여순 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사형 집행되었다.
 일제가 조선인 변호사의 변론조차 허용하지 않은 가운데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이다.
 어머니가 31살 먹은 아들에게 이 편지를 쓸 때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좀체 상상이 가질 않는다.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후 남은 가족들과 함께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상해임시정부가 생기자 1920년 상해로 가서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1859~1940)와 더불어 항일운동을 그치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는 감옥에 면회 온 두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멋대로 매장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

Ⅱ. “물론 낫 놓고 기역자 알 리 없는 황해도 텃골 군역전 부쳐 먹는 쌍놈의 집 아낙입니다. 그런 아낙이 제 자식 창수가 대동강 치아포나루에서 왜놈 한 놈 때려죽이고 물 건너 인천 감리영 옥에 갇히니 초가삼간 다 못질해버리고 옥바라지 객주 집 식모살이 침모살이 해가며 차꼬 물린 살인죄 자식 면회 가서 나는 네가 경기감사 한 것보다 더 기쁘다 이렇게 힘찬 말 했습니다.
 몇 십 년 뒤 여든 살 바라보는 백발노모 중국에 건너와 낙양군관학교 사람들이 생신날 축하하려고 돈 몇 푼씩 걷은 걸 알고 그 돈 미리 받아내어 생신날 단총 두 자루 내놓으며 자기들 걷은 돈으로 샀으니, 이 총을 쏴 부디부디 독립운동 이루어주시게. 그 뒤 그녀는 여든 두 살로 중경 땅에서 눈감았습니다.
 나라 독립 못보고 죽는 것 원통하다 이 말이 그녀가 남긴 말 한마디 아니고 무엇입니까?“
 시인 고은이 <만인보>에서 쓴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다.
 백범이 상해 임정 경무국장을 하던 1922년 무렵 어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 중국인들이 버린 쓰레기더미에서 배춧잎을 주워 다 가족들을 먹였다.
 1925년 황해도 안악으로 돌아와 푼푼이 아낀 돈을 아들에게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던 어머니는 1934년 일경의 감시를 피해 손자들을 데리고 상해로 탈출했다. 어머니는 군관학교 학생들을 돌보는 등 독립운동 뒷바라지에 온몸을 던졌고, 중일전쟁 와중에 임시정부가 중국 땅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중 풍토병에 걸려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아들 백범은 물론이고 임시정부 요인들에게도 서릿발 같은 모습을 보였다.
 백범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분단을 막기 위해 애를 쓰다가 흉탄에 쓰러졌다.
 백범을 쏜 안두희(1917~1996)는 육사8기 출신 군 장교였는데, 그 배후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Ⅲ.  “남개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채 누워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딸 규숙의 옷까지 팔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을 1927년 중국 천진에서 만난 한 인사의 증언이다.
 백사 이항복의 직계손으로 명문 중의 명문이었던 우당 집안은 나라가 망하자 그해 1910년 12월 만주로 망명한다.
 여섯 형제 모두 그 식솔까지 가족 전원이 빼앗긴 나라를 뒤로 하고 두만강을 건넜다.
 우당은 두만강을 건너며 뱃사공에게 뱃삯의 두 배를 쥐어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독립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우당 집안은 명동성당 앞 땅 등 전 재산을 처분해 거액을 손에 쥐고 만주에 터를 잡았다.
 일제에 대항하려면 무력 양성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우당은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1920년 폐교 때까지 3천 여 명에 이르는 독립군을 길러냈다. 이들이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주역들이다.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지망생들에게 학비를 전혀 받지 않았다. 우당 집안이 처분해온 재산은 그렇게 쓰였다.
 우당은 이후 상해, 북경, 천진 등에서 끊임없는 항일 투쟁을 펼쳐나갔고, 그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밥 굶기를 밥 먹듯 한 것이다.
 밀정의 밀고로 일제에 체포된 우당은 여순 감옥에서 갖은 악행을 당한 끝에 순국했다.
 우당 6형제 중 다섯째였던 이시영(초대 부통령)만 빼고 다섯 형제는 모두 중국 땅에서 생을 달리했다.
 그 아들들도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다.

Ⅳ.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정신이 없는 역사는 정신없는 민족을 낳으며, 정신없는 국가를 만들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오.”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9)의 말씀이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백범 김구선생의 어머니,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의 이야기는 우리가 잊어서 안 되는 우리 역사다.
 우리는 이 역사를 체화(体化)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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