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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015년 3월, 4월> 통합진보당의 해산결정과 법치주의 (한상희)
글쓴이 관리자
날 짜
15-03-3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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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국민은 다시 이민족의 노예가 아니오. 또한 다시 부패한 전제정부의 노예도 아니오. 독립한 민주국의 자유민이라” 대한민국 원년(1919) 11월 민족대표의 이름으로 독립신문에 수록된 임시정부수립 축하문의 한 구절이다. 당시 임시헌법은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되며 그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속한다고 규정하였다. 임시헌장 제1조에서 선언되었던 민주공화제의 이념이 의연히 대한민국의 역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연말 기습적으로 선고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은 이런 누대의 명령을 일거에 허물어뜨렸다. 국가권력이 법을 벗어나 자의적으로 행사되는 통치체제를 전제정부라고 한다면, 이 결정은 법과 상식 자체를 심판하고 폐제(廢除)해 버리는 그 전제정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지배에만 의존하는 정부란 어쩌면 다수의 힘에 의한 전제정부가 만들어짐을 의미한다. 미국의 연방헌법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도 그것이 다수의 지배로 환원되면서 이런 식의 폭력적 지배체제로 변질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이 다수의 권력을 적절히 통제하는 장치를 그 본질적인 요소로 삼게 된다. 설령 다수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건드려 훼손할 수 없는 어떤 고차의 가치들을 설정하고 이를 보호하는 체제를 만들어두는 것이다.
관용의 원칙은 그 대표적인 이념이다. 소수의 의견을 다수의 횡포로부터 보호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다양성을 확보하고 이 다양한 의견들이 토론과 숙고의 과정을 거쳐 그때그때의 다수의견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이념이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이 해산결정에서 이를 입헌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리하였다. “다수의 의사에 의해 소수의 권리가 무력화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우리 민주주의의 근본바탕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헌재는 이런 립 서비스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는 데에서 우리 헌정질서의 불행이 암종처럼 터져난다. 헌재의 결정은 줄곧 “한국사회의 특수성”이라는 망령이 사로잡혀 있다. 과거 유신체제에서 상용되었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거짓된 구호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남북한의 대립과 그로 인한 체제위기의 상황을 들먹일 뿐이다. 우리의 헌정질서는 민주주의도 공화주의도 아닌 그저 국가보안법이라는 초헌법적 법률에 옭매인 전제정일 따름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증후들은 결정문 도처에서 나타난다. 정치적 수사로도 흔히 사용되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든가 “민중주권”, “연방제” 통일방안 등의 말이 북한에서 사용하거나 그와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체제전복의 낙인을 찍었다. 고 리영희선생이 말한 “조건반사의 토끼”가 어떤 사상에는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하고 그 용어를 들으면 반드시 어떤 스테레오타입적인 관념을 떠올리게 만든 냉전·반공체제와 연관된다면, 이 헌재의 결정은 또 다른 유형의 “조건반사의 토끼”가 되어 버린 셈이다.
실제 이 결정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숨겨진 목적, 주도세력론, 퍼즐 맞추기 등의 논법들은 이런 억지를 위한 도구였다. 독일공산당해산판결에서 사용되었던 숨은 목적론은 독일공산당의 공식목표였던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는 것이 당시 독일공산당의 독일재무장반대와 독일재통일추구를 위한 운동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사건의 경우 헌재는 통합진보당의 강령에서는 전혀 거론되지도 않은 “북한식 사회주의”를 느닷없이 끌고 와서 통합진보당과 이것을 어떻게든 연결하기 위한 고리로 이 세 가지 논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다보니 이 결정문은 도처에서 이어령 비어령 식의 논리로 가득하다. 수 만 명의 당원을 가진 공식정당의 활동을 40명도 채 안 되는 그 “주도세력”들의 행태로 바꾸어 놓고, 이들의 과거 행적-그것도 이미 법적 판단이 끝난 행적이 대부분이다-들을 이리저리 잘라내고 다듬어서 필요한 것을 끼워 맞추는 퍼즐 맞추기의 공법을 사용하였다. 이미 만들어진 퍼즐조각을 조합하여 큰 그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헌이라는 그림부터 먼저 그려놓고 그 그림에 맞는 퍼즐조각을 찾거나 혹은 그것이 어려운 경우에는 아예 헌재가 퍼즐조각을 변형하거나 원하는 대로 만들어서 거기에 끼워 넣는 극도의 편법이 횡행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이 결정은 아무리 읽어도 통합진보당이 헌법에 위반되었기 때문에 해산시킨 것이 아니라,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헌법을 끌어다 맞춘 모습만 떠오른다. 헌법이 목적이 아니라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헌법을 수단처럼 동원한 것이다. 그러기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헌재의 해산결정은 다원성과 관용을 본질로 하는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인 동시에, “부패한 전제정부의 노예”이기를 거부한 우리의 헌법체제 자체를 유린한 것이 된다. 헌법에 의해 탄생된 헌재가 헌법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헌법을 침탈하고 유린함으로써 헌법을 심판해 버리는 패륜이 여기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해산결정을 두고 일각에서 연성쿠데타라고 지칭함은 이 때문이다. 실제 위헌정당을 해산하는 제도는 조봉암의 진보당이 행정처분으로 해산되고 사법살인이 그 뒤를 이었던 자유당정권 말기의 패악들을 막아내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헌재는 이 제도의 칼날을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헌법 그 자체에다 꼽아버렸다.
이 결정 후, 한 달여 만에 대법원은 이석기 전의원에 대한 판결을 내리면서 R.O라는 조직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헌재의 해산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축 하나를 부인해 버린 것이다. 이어 헌재는 그 결정문의 심각한 오류를 스스로 인정한 갱정 결정까지 하였다. 이 해산결정은 나오자마자 그 존재조차 부정당하는 기구한 운명에 봉착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결정이 우리에게 엄청난 먹구름을 드리운다. 그것은 87년 민주화 이래 진보세력이 제도정치권으로 적극 편입되면서 야기되었던 이념적 긴장에 대한 보수-수구-적인 집권세력의 노골적인 공세가 시작되었음을 만천하에 공표하였기 때문이다.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는 정치의 사법화현상은 이를 잘 수행한다. 정치영역에서의 페어플레이를 담보해야 할 법이 사법 관료들의 손아귀에 장악되면서 정치 자체를 지워버리는 파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법치가 유린되는 동안 아(我)국민들은 “독립한 민주국의 자유민”이 아니라 “부패한 전제정부의 노예”가 되기를 또 다시 강요당하게 된다.
헌재가 이 결정에서 말한 입헌적 민주주의와 기미년 임시헌장- 및 현행헌법-이 말하는 민주공화국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실제 임시헌장에서 사용한 민주공화제라는 말은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희귀한 용어였다. 그것은 국가의 주권을 대한인민 전체에 귀속시키고자 하는 우리 선열들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를 수호해야할 헌재는 더 이상 헌법의 자식이기를 거부한다. 아니 헌재를 앞세운 집권세력 자체가 이를 조장하거나 혹은 그 헌법유린의 현실을 강 건너 불 보듯 방관만 하고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다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명령을 외칠 수밖에 없어진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심판은 유권자가 투표로 해야 한다는 외침은 이제 헌재와 집권세력에 대한 심판은 우리 국민이 행동으로 하여야 한다는 구호로 바뀌어야 할 판이다. 기미년의 3·1혁명이 내세웠던 민주공화제의 이념이 이 지점에서 새삼 절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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