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00년

2019년도 임정 '송년의 밤' 행사 안내
2019년 제15차 정기총회 개최 안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스토리텔링 공모전> 수상자 발표
대한민국 임시정부 도해 (Infographic) 포스터 제작배포 안…
일본의 용기있는 언론인 <우에무라 다카시와 함께하는 …
“단지 역사는 제대로 기록돼야 한다”-통일뉴스
위안부 보도 ‘우에무라의 투쟁’…“혼자가 아니야” 한국…
"일본보다 우리 정부 더 증오, '친일의 피'는 못…
“약산 빼놓고 한국독립운동사 쓸 수 없다…예외로 서훈하…
시민사회계 원로 "약산 김원봉을... 지금이 어떤 때인가?"-…
임정정부 100년의 성과와 백년대계
임정정부 100년의 성과와 백년대계
김삼웅(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100주년의 역사인식 100년의 단위는 셈하기는 쉬워도 가늠하기는 쉽지가 않다. 100년이란 수치는 역사의 단위로는 순간이지만 당대인들에게는 긴 세월에 속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배웠던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을 그 100주년에 맞은 감회는 ‘역사의 현실감’이다. 이제서야 E. H. 카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란 말이 실감된다. 더불어 하필이면 그 100주년에 아베 일본수상의 ‘경제전쟁’ 도발과 신군국주의화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끊임없는 투쟁”이란 말을 되새기게 한다. 100년 전 우리 선대들은 위대했다. 1919년 1월 해외독립지사 39인의「대한독립선언」, 도쿄유학생들의「2ㆍ8독립선언」, 3월의 3ㆍ1혁명, 11월의 의열단 창단이 그것이다. 국치 9년 만에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통치와 봉건군주제를 거부하는 ‘다중혁명’을 통해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주의를 선언하였다. 따라서 기미년 3ㆍ1혁명은 민족사적으로는 자주독립, 문화사적으로는 반봉건, 정치사적으로는 민주공화, 세계사적으로는 반식민 해방운동의 횃불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한 일이다. 3ㆍ1혁명 후 국내외에서는 몇 갈래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시도되었다. 국치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먼저 해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시도하였다. 1914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ㆍ이동휘 등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ㆍ조소앙 등 17인이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창한 바 있다. 본격적인 임시정부의 수립은 3ㆍ1혁명 직후에 전개되었다.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조선이 독립국’ 임을 선언하였으니, 이를 대변하는 민족의 대표기구를 설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치 이래 희망을 잃고 노예처럼 살던 한민족은 3ㆍ1혁명을 계기로 근대적 민족의식에 눈 뜨게 되고, 수 많은 지사들이 국권을 되찾기 위해 국내에서 또는 해외 망명을 택해 독립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1919년 3~4월에 국내외에서 도합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공화정부, 간도임시정부 등은 수립 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채 전단으로만 발표되었다.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 상하이,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자주독립’과 ‘민주공화’ 두 날개의 임시정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1919년 4월 11일이다. 일제로부터 국토와 주권, 국민을 완전히 되찾아 ‘정식’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시’로 세운 정부였다. 상하이에서는 국내외에서 모여든 조선의 각지역 대표 29인이 4월 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와 정부 관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비록 망명정부일 망정 유사 이래 처음으로 민주공화제 정치체제를 채택하였다. 임시헌장의 10개 조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ㆍ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ㆍ언론ㆍ저작ㆍ출판ㆍ결사ㆍ집회ㆍ주소이전ㆍ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4조) 등 근대적 민주공화제의 헌법 내용을 담았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최고 수반인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일었다. 추천된 국무총리 후보 이승만의 적격성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회영ㆍ신채호ㆍ박용만 등 무장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이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하고, 의정원에서 이승만이 선출되자 이들은 회의장에서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이승만은 상하이로 오지 않고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한성정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 사이 3ㆍ1혁명 이후 여러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각 정부가 추대한 정부 수반이나 각료가 상호 중복되어 있고 또 국내외 각지에 떨어져 활동하고 있어 미취임 상태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각각의 임시정부는 기능이 공백상태에 빠져들었고 원활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단일정부로의 통합이 모색되었다. 상하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이며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8월말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 및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 정부와의 통합과 정부개편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수차례의 논의 끝에 9월 6일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정부 수반의 호칭을 대통령으로 하는 새 헌법과 개선된 국무위원이 발표되었다. 통합 임시정부가 정부 수반을 국무총리에서 대통령으로 바꾸게 된 것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의 줄기찬 요구 때문이었다. 국무총리로 선출되고서도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서 활동해온 이승만은 국무총리 아닌 대통령으로 행세하였다. 그는 대통령 호칭에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미국식 정치와 문화에 깊숙히 젖어 있어서 미국 정부의 수반 프레지던트란 호칭이 의식에 각인된 것이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정부령 제1호와 제2호를 반포하여 내외 동포에게 납세를 전면 거부할 것(제1호)과, 적(일제)의 재판과 행정상의 모든 명령을 거부하라(제2호)는 강력한 포고문을 발령하였다. 그리고 국내조직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한 데 이어 해외에는 거류민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관리하에 두었다. 연통제는 지방행정조직이고 교통국은 비밀 통신조직이었다. 국내의 무장ㆍ사상투쟁을 위하여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두고 1개 면에 1개의 교통소를 설치하도록 했으며, 연통제는 각 도와 각 군에 지방조직을 갖춰나갔다. 그러나 1920년 말부터 일제의 정보망에 걸려 국내의 지방조직이 파괴되고, 3ㆍ1혁명의 열기가 점차 사그라지면서 국내의 독립기금 송금과 청년들의 임시정부 참여가 크게 줄어들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이승만 대통령 선임을 둘러싸고 외무총장 박용만과 교통총장 문창범이 취임을 거부한 데 이어 이회영ㆍ신채호 등 무장투쟁 주창자들이 상하이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가버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가 러시아 정부에서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을 독자적으로 처리하여 물의를 일으키다가 1921년에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동녕 → 신규식→노백린이 차례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정부를 이끌만큼 불안정한 상태로 운영되었다.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1920년 12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이승만이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반만에 왔으니 임시 대통령으로서 무슨 방책을 준비해 온 것으로 믿고 기다렸으나,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못하였다.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던 임정 요인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떠나는 이들을 붙잡아 포용하려는 대신 신규식ㆍ이동녕ㆍ이시영ㆍ노백린ㆍ손정도 등을 새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하였다. 당시 만주,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는 민족독립을 위한 무장독립전쟁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어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대한광복군, 광복군총영, 의열단, 의군부, 대한신민단, 혈성단, 신대한청년회, 복황단, 창의단, 청년맹호단, 학생광복단. 자위단 등이 결성되고, 특히 1911년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강력한 군사훈련을 통해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였다. 만주 각지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 세력은 연대하여 봉오동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를 통해 국치 이래 최대의 항일대첩을 이루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독선과 독주로 요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실현성이 취약한 ‘외교독립론’에 빠져 있었다. 광복군창설ㆍ대일선전포고ㆍ좌우통합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되고, 이를 이유로 이승만은 1921년 5월 상하이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의 1년 반 동안 임시정부의 활동은 이로써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떠났다. 얼마 후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하였다. 임시정부는 이런 분란을 극복하고 일제패망 때까지 27년 동안 항일민족해방투쟁의 본거지로서 독립전쟁을 지휘하였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ㆍ윤봉길 의거를 주도하고, 광복군을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한 것도 임시정부였다. 광복군을 기반으로 일제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전후처리를 위해 미ㆍ영ㆍ중 3국의 수뇌가 카이로회담을 앞두고 있을 때 김구 주석 등이 장제스 중국총통과 교섭하여 ‘한국의 독립’을 카이로선언에 담기로 한 것은 큰 외교적 성과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민족혁명당 등 좌파세력과 연대하여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하면서 일제와 싸웠다. 통합정부에는 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들까지 참여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명실상부한 한민족의 대표기관이 될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특장은 왜적과 싸우는, 그야말로 전시체제인데도 불구하고 정부수립 과정부터 의정원에 의해 각료를 선임하고, 주요 정책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나 폴란드 망명정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대부분의 망명정부는 군정체제였다. 임시정부는 또한 일제 패망을 내다보면서 ‘건국강령’을 제정하여 향후 수립될 독립정부의 정책방향을 준비하였다. 3균주의사상의 원칙에 따른 주요 정책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상당 부분 그대로 계승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중원천지를 이동하면서 국권회복에 대한 의지를 한 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많은 요인들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고 온갖 고통을 견디면서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까지 한민족의 국혼과 정통성을 지켜왔다. 임시정부가 추구했던 가치는 국권회복과 민주공화제였다. 국권이 회복되고 74주년, 아직도 우리는 분단상태를 면치 못한 현실이고, 선열들이 꿈꾸던 민주공화제도 아직 완벽하지 못한 상태이다. 4ㆍ19혁명ㆍ광주민주화운동ㆍ6월항쟁ㆍ촛불혁명 등을 통해 민주주의는 지켜냈지만, 공화주의는 아직 준비단계가 아닌가 싶다. 임시정부로부터 대한민국에 이어받은 가장 큰 테제는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제의 발전이다. 해방 74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단상태는 고착되고 ‘자주’의 상징과 같은 전시작전지휘권도 회수하지 못한 상태이다. 미국의 책임이 크지만 내부 냉전사대주의자들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여기에 신군국주의를 꿈꾸는 아베 일본의 도발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지난 세기의 악몽이 재현되지 않도록, 대비와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한반도는 미ㆍ중ㆍ일의 3각파고에 ‘토착왜구’들까지 설치고, 이들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다. 남북관계는 여전히 북미관계의 작용과 반작용의 변수가 되어 예측을 어렵게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해방까지 27년이 혈사(血史)였다면 이후 74년은 통사(痛史)라 할 것이다. 분단ㆍ동족상쟁ㆍ백색독재ㆍ군사독재ㆍ사이비문민정부를 겪으면서도 우리 국민은 ‘5030클럽’에 진입하고 민주주의를 지켰다.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룬 성과이다. 하지만 아직 자주독립의 길은 멀고, 민주공화도 허술한 편이다. 우리 선대들이 포악한 일제와 싸우며 독립운동을 했듯이, 당대인들도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평화통일운동에 나서야 하며, 틈만 나면 민주체제를 뒤엎으려는 ‘유신5공’ 잔당들에 맞서야 하겠다. 특히 ‘민주공화’의 민주는 여러 차례 시민항쟁을 통해 제도화와 실제화에 이르렀는데, 공화(共和)는 아직 초보단계에 서 있다. 공화(국) Republic의 라틴어 어원인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는 ‘공공의 소유’를 뜻한다고 한다. 국민 모두가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것이다. 상위 1%가 국부의 30% 정도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공화국의 질서에 반하는 현상이다. 다시 되새긴다. 100년 전 우리 선대들은 위대했다. 그리고 지난 100년 당대인들도 못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이만큼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제도 만만치 않다. 자주독립과 평화통일, 민주공화라는 테제가 우리들과 우리 후손들의 몫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향후 100년 대계를 세울 때이다.
임정정부 100년의 성과와 백년대계
임정정부 100년의 성과와 백년대계
김삼웅(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100주년의 역사인식 100년의 단위는 셈하기는 쉬워도 가늠하기는 쉽지가 않다. 100년이란 수치는 역사의 단위로는 순간이지만 당대인들에게는 긴 세월에 속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배웠던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을 그 100주년에 맞은 감회는 ‘역사의 현실감’이다. 이제서야 E. H. 카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란 말이 실감된다. 더불어 하필이면 그 100주년에 아베 일본수상의 ‘경제전쟁’ 도발과 신군국주의화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끊임없는 투쟁”이란 말을 되새기게 한다. 100년 전 우리 선대들은 위대했다. 1919년 1월 해외독립지사 39인의「대한독립선언」, 도쿄유학생들의「2ㆍ8독립선언」, 3월의 3ㆍ1혁명, 11월의 의열단 창단이 그것이다. 국치 9년 만에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통치와 봉건군주제를 거부하는 ‘다중혁명’을 통해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주의를 선언하였다. 따라서 기미년 3ㆍ1혁명은 민족사적으로는 자주독립, 문화사적으로는 반봉건, 정치사적으로는 민주공화, 세계사적으로는 반식민 해방운동의 횃불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한 일이다. 3ㆍ1혁명 후 국내외에서는 몇 갈래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시도되었다. 국치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먼저 해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시도하였다. 1914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ㆍ이동휘 등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ㆍ조소앙 등 17인이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창한 바 있다. 본격적인 임시정부의 수립은 3ㆍ1혁명 직후에 전개되었다.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조선이 독립국’ 임을 선언하였으니, 이를 대변하는 민족의 대표기구를 설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치 이래 희망을 잃고 노예처럼 살던 한민족은 3ㆍ1혁명을 계기로 근대적 민족의식에 눈 뜨게 되고, 수 많은 지사들이 국권을 되찾기 위해 국내에서 또는 해외 망명을 택해 독립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1919년 3~4월에 국내외에서 도합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공화정부, 간도임시정부 등은 수립 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채 전단으로만 발표되었다.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 상하이,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자주독립’과 ‘민주공화’ 두 날개의 임시정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1919년 4월 11일이다. 일제로부터 국토와 주권, 국민을 완전히 되찾아 ‘정식’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시’로 세운 정부였다. 상하이에서는 국내외에서 모여든 조선의 각지역 대표 29인이 4월 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와 정부 관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비록 망명정부일 망정 유사 이래 처음으로 민주공화제 정치체제를 채택하였다. 임시헌장의 10개 조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ㆍ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ㆍ언론ㆍ저작ㆍ출판ㆍ결사ㆍ집회ㆍ주소이전ㆍ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4조) 등 근대적 민주공화제의 헌법 내용을 담았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최고 수반인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일었다. 추천된 국무총리 후보 이승만의 적격성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회영ㆍ신채호ㆍ박용만 등 무장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이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하고, 의정원에서 이승만이 선출되자 이들은 회의장에서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이승만은 상하이로 오지 않고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한성정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 사이 3ㆍ1혁명 이후 여러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각 정부가 추대한 정부 수반이나 각료가 상호 중복되어 있고 또 국내외 각지에 떨어져 활동하고 있어 미취임 상태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각각의 임시정부는 기능이 공백상태에 빠져들었고 원활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단일정부로의 통합이 모색되었다. 상하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이며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8월말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 및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 정부와의 통합과 정부개편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수차례의 논의 끝에 9월 6일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정부 수반의 호칭을 대통령으로 하는 새 헌법과 개선된 국무위원이 발표되었다. 통합 임시정부가 정부 수반을 국무총리에서 대통령으로 바꾸게 된 것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의 줄기찬 요구 때문이었다. 국무총리로 선출되고서도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서 활동해온 이승만은 국무총리 아닌 대통령으로 행세하였다. 그는 대통령 호칭에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미국식 정치와 문화에 깊숙히 젖어 있어서 미국 정부의 수반 프레지던트란 호칭이 의식에 각인된 것이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정부령 제1호와 제2호를 반포하여 내외 동포에게 납세를 전면 거부할 것(제1호)과, 적(일제)의 재판과 행정상의 모든 명령을 거부하라(제2호)는 강력한 포고문을 발령하였다. 그리고 국내조직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한 데 이어 해외에는 거류민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관리하에 두었다. 연통제는 지방행정조직이고 교통국은 비밀 통신조직이었다. 국내의 무장ㆍ사상투쟁을 위하여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두고 1개 면에 1개의 교통소를 설치하도록 했으며, 연통제는 각 도와 각 군에 지방조직을 갖춰나갔다. 그러나 1920년 말부터 일제의 정보망에 걸려 국내의 지방조직이 파괴되고, 3ㆍ1혁명의 열기가 점차 사그라지면서 국내의 독립기금 송금과 청년들의 임시정부 참여가 크게 줄어들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이승만 대통령 선임을 둘러싸고 외무총장 박용만과 교통총장 문창범이 취임을 거부한 데 이어 이회영ㆍ신채호 등 무장투쟁 주창자들이 상하이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가버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가 러시아 정부에서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을 독자적으로 처리하여 물의를 일으키다가 1921년에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동녕 → 신규식→노백린이 차례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정부를 이끌만큼 불안정한 상태로 운영되었다.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1920년 12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이승만이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반만에 왔으니 임시 대통령으로서 무슨 방책을 준비해 온 것으로 믿고 기다렸으나,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못하였다.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던 임정 요인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떠나는 이들을 붙잡아 포용하려는 대신 신규식ㆍ이동녕ㆍ이시영ㆍ노백린ㆍ손정도 등을 새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하였다. 당시 만주,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는 민족독립을 위한 무장독립전쟁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어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대한광복군, 광복군총영, 의열단, 의군부, 대한신민단, 혈성단, 신대한청년회, 복황단, 창의단, 청년맹호단, 학생광복단. 자위단 등이 결성되고, 특히 1911년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강력한 군사훈련을 통해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였다. 만주 각지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 세력은 연대하여 봉오동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를 통해 국치 이래 최대의 항일대첩을 이루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독선과 독주로 요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실현성이 취약한 ‘외교독립론’에 빠져 있었다. 광복군창설ㆍ대일선전포고ㆍ좌우통합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되고, 이를 이유로 이승만은 1921년 5월 상하이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의 1년 반 동안 임시정부의 활동은 이로써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떠났다. 얼마 후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하였다. 임시정부는 이런 분란을 극복하고 일제패망 때까지 27년 동안 항일민족해방투쟁의 본거지로서 독립전쟁을 지휘하였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ㆍ윤봉길 의거를 주도하고, 광복군을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한 것도 임시정부였다. 광복군을 기반으로 일제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전후처리를 위해 미ㆍ영ㆍ중 3국의 수뇌가 카이로회담을 앞두고 있을 때 김구 주석 등이 장제스 중국총통과 교섭하여 ‘한국의 독립’을 카이로선언에 담기로 한 것은 큰 외교적 성과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민족혁명당 등 좌파세력과 연대하여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하면서 일제와 싸웠다. 통합정부에는 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들까지 참여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명실상부한 한민족의 대표기관이 될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특장은 왜적과 싸우는, 그야말로 전시체제인데도 불구하고 정부수립 과정부터 의정원에 의해 각료를 선임하고, 주요 정책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나 폴란드 망명정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대부분의 망명정부는 군정체제였다. 임시정부는 또한 일제 패망을 내다보면서 ‘건국강령’을 제정하여 향후 수립될 독립정부의 정책방향을 준비하였다. 3균주의사상의 원칙에 따른 주요 정책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상당 부분 그대로 계승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중원천지를 이동하면서 국권회복에 대한 의지를 한 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많은 요인들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고 온갖 고통을 견디면서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까지 한민족의 국혼과 정통성을 지켜왔다. 임시정부가 추구했던 가치는 국권회복과 민주공화제였다. 국권이 회복되고 74주년, 아직도 우리는 분단상태를 면치 못한 현실이고, 선열들이 꿈꾸던 민주공화제도 아직 완벽하지 못한 상태이다. 4ㆍ19혁명ㆍ광주민주화운동ㆍ6월항쟁ㆍ촛불혁명 등을 통해 민주주의는 지켜냈지만, 공화주의는 아직 준비단계가 아닌가 싶다. 임시정부로부터 대한민국에 이어받은 가장 큰 테제는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제의 발전이다. 해방 74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단상태는 고착되고 ‘자주’의 상징과 같은 전시작전지휘권도 회수하지 못한 상태이다. 미국의 책임이 크지만 내부 냉전사대주의자들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여기에 신군국주의를 꿈꾸는 아베 일본의 도발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지난 세기의 악몽이 재현되지 않도록, 대비와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한반도는 미ㆍ중ㆍ일의 3각파고에 ‘토착왜구’들까지 설치고, 이들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다. 남북관계는 여전히 북미관계의 작용과 반작용의 변수가 되어 예측을 어렵게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해방까지 27년이 혈사(血史)였다면 이후 74년은 통사(痛史)라 할 것이다. 분단ㆍ동족상쟁ㆍ백색독재ㆍ군사독재ㆍ사이비문민정부를 겪으면서도 우리 국민은 ‘5030클럽’에 진입하고 민주주의를 지켰다.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룬 성과이다. 하지만 아직 자주독립의 길은 멀고, 민주공화도 허술한 편이다. 우리 선대들이 포악한 일제와 싸우며 독립운동을 했듯이, 당대인들도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평화통일운동에 나서야 하며, 틈만 나면 민주체제를 뒤엎으려는 ‘유신5공’ 잔당들에 맞서야 하겠다. 특히 ‘민주공화’의 민주는 여러 차례 시민항쟁을 통해 제도화와 실제화에 이르렀는데, 공화(共和)는 아직 초보단계에 서 있다. 공화(국) Republic의 라틴어 어원인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는 ‘공공의 소유’를 뜻한다고 한다. 국민 모두가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것이다. 상위 1%가 국부의 30% 정도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공화국의 질서에 반하는 현상이다. 다시 되새긴다. 100년 전 우리 선대들은 위대했다. 그리고 지난 100년 당대인들도 못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이만큼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제도 만만치 않다. 자주독립과 평화통일, 민주공화라는 테제가 우리들과 우리 후손들의 몫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향후 100년 대계를 세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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